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
기숙사에서 시험을 준비하던 지난 3월,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못 보는 엄마의 전화가 반가워 부리나케 받았다.
"은비야, 잠깐 통화 괜찮니?"
평소 엄마답지 않은 짙은 회색빛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했다. 엄마와는 종종 서로의 자문위원 역할을 했던 터라 "그럼, 괜찮지" 하고 답했는데 뒤에 이어진 말은 전혀 괜찮지 않은 것이었다.
"아빠가 심장 수술을 받았어. 아니다, 요즘엔 그 정도는 시술이래."
아빠가 급성 심근경색 판정을 받고 수술을 마쳤다고 했다. 내가 아는 그 심근경색? 아빠가? 놀라움과 당황함에 벙벙한 것도 잠시, 엄마의 상태가 걱정되어 안부를 물었다.
엄마는 "네 엄마 과부될 뻔 했어~"라며 농담을 건넸지만 채 다 감추지 못한 무서움이 핸드폰을 타고 전해졌다. 시간이 많지 않아 간단한 대화로 서로를 달래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수술
펜을 쥔 손이 허공에서 빙빙 돌길 몇 차례. 곰곰이 생각하니 우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심근경색은 돌연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데 아빠는 당신이 직접 운전해서 대학 병원 응급실로 걸어들어간 희귀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아빠는 종종 등 결림으로 불편함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오른쪽 팔에서 느껴지던 압박감도 어깨와 등 근육이 뭉쳐서 그런 줄 아셨단다.
그런데 저녁 10시경 손을 따도 무언가 죄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자 동네 24시 병원을 방문했다고. 그날 업무가 많았는지 병원 스태프의 무신경한 대응과 불친절함에 골이 난 아빠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엄마의 권유로 저녁 11시경 대학 병원으로 갔다(역시 엄마 말은 자다가도 잘 들어야 된다).
피검사와 심전도 검사를 마친 뒤 대기하고 있던 아빠는, 헐레벌떡 검사 결과지를 들고 달려온 의사의 "지금 당장 수술하셔야 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새벽 2시에 입원 후 그날 아침 심장에 스텐트를 삽입하게 된 것이었다.
의사는 담배, 기름진 음식, 단 음료를 조심하라고 말했다. 모두 아빠의 절친이었다. 담배는 그 전부터 관리하고 있긴 했는데 음식만큼은 영 아빠 의지대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결국 엄마가 나섰다. 엄마는 아빠가 좋아하던 돼지고기 대신 오리고기로, 식후에 먹던 탄산음료 대신 탄산수로, 저녁 식단도 양념된 음식보다는 채소나 두부를 이용한 담백한 음식으로 바꿔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엄마도 곧이어 받은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왔다. 그것은 엄마가 햄버거 세트를 점심으로 먹었다는 것 만큼이나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는 언제나 '유기농'과 '오리지날'을 강조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는 '식단 관리자 자격'을 박탈당했고, 막 시험에서 해방되어 본격 '집사람'이 된 내가 그 후임을 맡게 되었다.
마침 시간도 있고 요리에 흥미도 있던 나에게 문제는 딱 하나, 요리 실력이었다. 조리학과 출신에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동생과는 달리 나는 밥 짓는 것도 고등학생 때 깨우친 요리 부진아 중 부진아였다.
계란찜에 물이 들어간다는 것도(계란물찜이 아니잖아!) 동생들과 함께 요리를 하다 알게 되었는데, 그 일은 두고두고 내 '부엌 금지령'의 근거가 되고 있다.
식탁의 변화
다행히 요즘에는 유튜브가 있어 일단 만들기 쉬워 보이는 것부터 탐색했다. 그땐 여름철이라 시원하면서도 만들기 어렵지 않은 면 요리를 하기로 했다. 면 요리는 라면으로 획득한 스킬을 써먹을 수 있는 그나마 자신 있는 요리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게시한 메뉴는 바로 메밀국수. 면을 삶아서 쯔유와 물을 1:1 비율로 섞은 소스와 함께 내주면 끝이라 다행히 1시간 밖에 안 걸렸다.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았다. 첫 승리와 자신감을 안겨준 메밀국수는 나중에 '양파 많이 메밀국수'로 업그레이드 된다.
두 번째 요리는 여기서 소스를 살짝 변형한 메밀 콩국수. 아빠가 전날 콩국물을 사와서 콩국수를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는데, 밀가루면 대신 메밀면을 넣어도 맛있을 것 같아서 바로 적용해봤다.
소스를 따로 만들 필요도 없이 삶은 면에 원하는 만큼 콩국물을 넣고 소금과 깨를 뿌려주면 돼서 훨씬 쉬웠다. 같은 메뉴를 연달아 먹지 않는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아빠도 베이스가 되는 국물이 달라서인지 불만 없이 잘 드셨다. 아, 우리 집은 전부 소금파다.
바로 그 다음 날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대개 맛과 칼로리는 비례하는 편이라 아빠 입맛을 사로잡으면서도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더라도 막상 하려면 3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아 엄두가 안 났다.
2대 식단 관리자로서 저녁 식사에 차갑게 식은 밥을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아삭한 식감의 채소를 좋아하는 엄마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온 세 번째 요리는 메밀국수 샐러드. 아빠는 이제 메밀을 질려하셨지만, 엄마가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어 일주일 간 메밀 돌려막기를 어찌저찌 성공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진짜 다른 메뉴를 해야 할 때. 아빠가 생각보다 채소를 잘 먹어서 과감하게 샐러드를 도전해보기로 했다. 맛없는 건 절대 안 되니까 기숙사에서 즐겨 먹던 '단호박 리코타 샐러드'를 만들기로 했다.
양상추를 밑에 넉넉히 깔아주고 삶은 계란과 단호박을 그 위에 얹어준다. 마땅한 찜기가 없어 단호박을 어떻게 삶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엄마가 단호박을 비닐로 감싸 전자레인지에 넣으면 된다고 하셨다.
3분 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반으로 가르자 다홍빛을 내는 포슬포슬한 단호박이 만들어졌다. 리코타 치즈와 함께 샐러드 위에 얹어주면 모양도 맛도 좋은 요리 완성! 나처럼 시간과 물의 양을 재는 것을 힘들어하는 초보 요리사들에게 안성맞춤인 메뉴다.
요즘 우리집 식탁
다행히 아직 2대 식단 관리자는 건재하다. 요즘엔 우리 가족과 일면식이 없었던 요리를 하나 둘 소개하고 있다. 바질을 사서 바질페스토와 토마토 바질 마리네이드를 만들었는데, 갖은 요리와 잘 어울린다.
특히 토마토 바질 마리네이드! 이게 또 탄산수에 넣어 먹으면 기가 막히다. 만드는 방법도 토마토와 양파, 바질, 올리브유, 꿀, 소금, 후추를 자르고 두르고 뿌리기만 하면 돼서 아주 쉽다.
엄마는 통밀빵에 과카몰리를 올려 먹는 것에 푹 빠졌다. 그런데 아보카도를 잘 몰라서 후숙이 안 된 걸 무리해서 잘랐다가 씨가 안 빠져서 결국 힘으로 제압했다.
보기만 해도 초록초록 해지는 식단 덕분일까, 아빠의 건강은 새록새록 회복되고 있다. 심근경색과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로 집에서 2주에 한 번씩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최근 다시 방문한 병원 검사 결과 95에서 11로 콜레스테롤 수치가 많이 낮아졌다고 한다.
탄산음료와 믹스커피를 먹는 횟수도 줄었다. 엄마도 밥을 먹은 후에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신다. 나는 마라탕 먹는 횟수를 줄였다. 심근경색이라는 충격의 여파는 오늘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