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27일 오후,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일주일 전 고향 진주에서 어머니 간병을 하고 있던 저는 급성 패혈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 생사를 오가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병간호를 위해 입원실을 지키고 있던 아내는 장인어른께서 코로나 증상으로 위독한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애를 태웠습니다. 남편 병간호를 위해 진주 병원에 머물고 있는데 장인어른께서 청주 병원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앞둔 일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장인어른께서 하루를 넘기기 힘들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 혼자 떠나려 하던 날 점심 무렵, 패혈증 치료 효과가 예상보다 좋아져서 퇴원해서 치료받아도 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휴 전날이라 어렵게 예매한 버스표를 취소하고 몇 가지 짐만 챙겨 곧바로 청주 병원을 향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몸 상태에서 진주에서 청주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습니다.
늘 오가던 익숙한 길이었지만 세 번이나 휴게소를 들러 몸 상태를 살피고 나서 다시 출발하느라 도착시간은 점점 더 늦어졌습니다. 결국 덕유산 휴게소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는 장인어른께서 임종하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운전하는데 신경 쓰일까 봐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던 아내를 옆 눈으로 살피다 살며시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상복으로 갈아입고 빈소를 지켰습니다. 추석날은 화장장을 운영하지 않아 화장 절차를 하루 늦춰 진행해야 했고 괴산호국원으로 모시는 절차를 밟는 데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을 수 없어 다른 증명 자료를 찾느라 장인어른 유품을 뒤지기도 했습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오가는 길이 막히는데도 멀리서 조문을 오시는 문상객을 맞이했습니다. 올 2월 교직을 마무리한 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항생제 치료를 받느라 입술과 코 눈 주위가 진물인 제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걱정스레 물었습니다. 대답을 주저하는 저를 보고 아내는 "잘못했으면 혼자서 두 번이나 큰일을 치를뻔했다"며 며칠 사이 닥친 일을 담담하게 전했습니다.
빈소를 지키는 첫날, 박만순 작가가 조문을 왔습니다. 박 작가는 2002년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으며 보도연맹사건과 부역혐의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북한군과 지방 좌익에 의한 사건) 현장을 답사하고 희생자 유족을 만나 구술증언을 청취해 '골령골의 기억전쟁', ' 박만순의 기억전쟁 1,2,3' 등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박 작가는 장인어른 부친의 죽음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장인어른과 함께 몇 차례 사건 현장을 답사하고 구술증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2020년 10월 11일, 박 작가는 장인어른을 찾아와서 '서병두 암살 사건'에 관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구순이 넘은 장인어른은 72년 전인 1948년 4월 9일, 그날 당신께서 겪으신 일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장인어른께서 증언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1929년생, 94세로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한국 현대사가 남긴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관련 기사 :
좌익테러로 사망한 아버지, 아흔 넘은 아들은 아직도 트라우마에 https://omn.kr/20suu)
열아홉 나이에 부친이 남로당 조직원 손에 의해 비명에 가신 비극을 겪었습니다.
부친 원수를 갚는다며 범인이 붙잡혀 재판받는 법정에 칼을 숨겨 들어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50년 7월 피난길에서 당시 CIC 대원이었던 숙부 주선으로 경찰에 투신하셨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영동 민주지산 공비 토벌 작전 등에 참전하셨던 장인어른 몸에는 그때 입은 총상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장인어른 부친의 죽음에 대해 정부 수립 이전 사건이라는 이유로 명예 회복조차 외면해왔습니다.
이런 처가 집안 내력과는 정반대로 아내와 결혼할 당시 저는 전교조 해직 교사였습니다. 그냥 해직 교사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해직된 '빨갱이교사'였습니다. 당신께서 걸어오신 길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위를 장인어른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2021년 9월, 그 사위가 3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빨갱이교사'라는 누명을 벗게 되었을 때, 장인어른께서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셨습니다. (관련 기사 :
빨갱이' 누명 벗은 교사 "담임·교감·교장은 사과하라 https://omn.kr/1v3kp)
2023년 9월 30일 오전 11시 40분, 장인어른께서는 한 줌 재로 돌아가셨습니다. 열아홉 청년 시절 헤어졌던 부친과 칠십오 년 만에 다시 만나 좌우도 없고 죽고 죽이는 비극도 없는 그곳에서 평안히 지내시도록 기도드렸습니다.
남북이 갈라져 있고 사람들 사이에 이념이라는 벽도 여전히 높은 이 땅에서 얼마나 더 세월이 흘러야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상생하는 후천개벽 해원(解寃)의 세상이 올까요?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픈 저 유명한 노래의 가사처럼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이 사람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내야 사람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야 다른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음을 알게 될까요?" 정녕 그 대답을 바람만이 알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