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방학을 맞은 대학생 딸이 모델학원에 등록하겠다고 선언했다. 갑자기 모델? 모델은 아무나 하나 싶은데, 사연인즉슨 적성에 안 맞는 공부를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고등학교 시절 내내 공부 말고 뭔가 다른 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한다. 그 또래 10대들 다수가 그렇듯 대중의 관심 속에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연예인의 삶을 선망했었나 보다.
정상의 인기를 얻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극심한 경쟁을 딛고 그 자리에 서게 되는지 과정은 별반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다. 남의 떡은 늘 커 보이기 마련인 것을... 머리 아픈 공부만 아니면 뭐든 쉽게 될 줄 아는 딸이 딱했지만, 딸은 모델학원에 전격 등록했다. 설령 모델이 안 되더라도 직접 경험을 해 봐야 평생 미련이 남지 않을 거라며.
이백만원이 훌쩍 넘는 학원 비용도 본인이 아르바이트로 직접 마련한 터라 마땅히 저지할 명분도 없었다.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딸의 모델 수업은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모인 30명쯤 되는 수강생들은 중학생부터 20대 중반까지의 남, 여로 도쿄출신의 일본인도 한 명 있다고 했다. 워킹과 근력운동을 주된 커리큘럼으로 메이크업과 안무 연습, 퍼스널 칼라 찾기, 프로필 사진 찍기 등의 특강이 진행되었다.
호기심이 충족되고 훈련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으면 금방 시큰둥해지겠지 했다. 그런데 웬걸 그게 아니었다. 키는 크지 않지만 팔다리가 길어 비율이 좋다거나, 워킹을 곧잘 한다며 칭찬을 듣고 딸이 고조된 기분으로 귀가할 때면 '어, 이건 아닌데...' 싶어 슬슬 긴장이 되었다. 이러다 정말 모델을 하겠다 작정하는 건 아닌지 딸이 몰입할수록 나는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제가 하겠다 하면 부모로서 적당히 지원해 주면 되는 일이지만, 정말 딸의 적성에 적합한지, 스쳐가는 바람기는 아닌지 갈피를 잡기 어려워 노파심이 일기 시작했다. 궁금하면서 한편으론 답답한 마음에 평소에도 관심 있던 사주명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명리 책을 이것저것 뒤지고, 유튜브도 닥치는 대로 찾아보며 알게 된 지식을 틈틈이 기록했다.
인공지능과 정보화 시대에 웬 케케묵은 사주타령이냐 여길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을 이해하는 틀로 분명히 수긍가는 바가 있었다. 태어나는 시점에 땅과 하늘의 기운을 목, 화, 토, 금, 수 음양오행으로 정리하여 기질과 건강, 행동양식, 그리고 등락하는 삶의 흐름까지 설명해 내니 말이다. 선뜻 이해되지 않던 인간사의 원인과 결과가 사주명리의 틀로 보면 논리적으로 해석이 된다는 점에서 또한 매력적이기도 했다.
게다가 나를 상징하는 일간을 기준으로 식상, 재성, 관성, 인성 육친(십성)의 틀로 가족, 직장, 사회 등 주변 환경과의 상호 작용에 대한 설명도 가능하다. 변하지 않는 자신의 사주원국 여덟 글자는 10년마다 바뀌는 대운, 매년 바뀌는 세운의 글자들을 만나는데, 글자들끼리에도 좋고 나쁨이 있어 형, 충, 파, 해, 합으로 구분되며 이 또한 삶에 영향을 끼친다.
사주명리를 모르고도 삶은 돌아가지만, 알고 보면 납득되는 점이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관심 속에 명맥을 잇고 있는 것 같다. 한낱 책 몇 권과 유튜브를 통해 얻은 얄팍한 지식이지만 서너 달 남짓을 매달리며 이제 좀 파악했나 싶은데 새로운 개념이 계속 등장해 끝이 없다. 우스운 건, 아직 전모를 알지 못하는데도 지엽적인 뭔가를 새로 알게 되면 놀랍고 재미있어서 가족들에게 구구절절 말해대지 않고는 못 배겼다.
어제는 이래서 좋을 거라 해놓고 오늘 새로 알게 된 지식으로 그게 아니었다며 자꾸 말을 번복해 대니, 들어주는 가족들이 점점 괴로워했다. 직장 잘 다니는 남편에게 '60대에 관운이 깨지는 대운이 오니 어떡하냐?'고 답도 없는 쓸데없는 걱정을 일으키거나(어차피 60대에 정년은퇴라 관이 깨지는 건 이미 기정사실인데), 자녀들에게 원하지도 않는 조언을 날려서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말 그대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이었다.
가족들의 신뢰만 잃는 꼴이 되어가니 말을 점점 삼가고 자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정확하지도 않은 조언을 남발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 기저엔 미래의 위험과 고난을 미리 알아 통제해 보겠다는 심리가 강하게 발동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수한 변수와 우연이 도사리는 삶에 만사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일 것이다.
일어날 일은 아무래도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어떤 운이라도 절대적으로 나쁘거나 좋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극에 달한 재복이 필연적으로 건강을 해칠 기운을 높이는 것처럼 좋은 면이 있으면 반대편의 그늘이 늘 함께 온다는 것이다. 명예, 돈, 이성이 좋다고 과하게 쫓기만 할 게 아니라 매사 겸허하게 살아낸다면 복도, 화도 적당한 선에서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주명리를 몇 달을 파도 정작 궁금했던 딸의 진로에 대한 답은 애매모호했다. 나의 얕은 해석으론 딸이 운동이나 몸 쓰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 점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던 일)과 다양한 경험이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된다는 걸 확인하는 정도였다. 결국 답은 딸 스스로 찾았는데, 더 이상 모델 쪽의 일에 마음을 접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모델을 하기 위해 10kg 가까이 체중을 감량하는 일은 먹는 걸 좋아하는 녀석에게 혹독한 고문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무대 뒤편 즉, 무대가 끝나고 난 후 휩싸이는 심리적 공허감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게 모델에 관한 부푼 마음이 가라앉고 나니 그제야 전공 공부가 좀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고 한다. 결국 비싼 수업료 내며 자신의 손에 쥔 것에 감사하게 된 셈이 아니었나 싶다.
딸의 진로 고민 덕분에 나의 사주 명리 공부만 남았다. 재미있으니 더 해볼 요량이다. 하지만 사주가 아무리 나 자신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해도 노상 글자만 들여다 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평상시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한계와 깊이를 알아가는 노력 또한 등한시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