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는 어디일까. 일부에서는 미국 북감리회 소속 아펜젤러가 1885년 7월 서울 서소문동에 집을 한 채 사서 시작했던 배재학당이 처음이라고 보는 설이 있지만, 정현덕(1810~1883)이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외영을 설치해 군사훈련과 무예교육을 했던 동래무예학교, 정현석(1817~1899)의 원산학사도 눈여겨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끈다.
최학삼 김해대학교 교수(사회복지상담)는 최근에 펴낸 <김해에는 정현석, 동래에는 정현덕>(도서출판 선인 간)이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에 대해 정리해 놓았다. 이 책은 "흥선대원군 집권시기 낙동강 건너 두 명의 초계정씨 사또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근대 교육'의 기준에 대해, 최 교수는 정재걸 대구교대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교육기회의 보편화'와 '교육의 세속화', '교육의 민족주의화'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근대교육은 "'권리로서의 교육'을 보편적으로 현실화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고, "양심의 권리 혹은 내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종교적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하며, "기독교 중심의 보편교육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모국어, 모국역사 중심의 애국 교육이 보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학삼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에 대해 지금까지는 '배재학당설'과 '원산학사설', '18세기 서당설', '식민지 교육설'의 4가지 학설이 있었다고 했다.
배재학당에 대해, 최 교수는 "아펜젤러가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기록에 '우리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고 하여, 이 해를 배재학당의 출발로 보고 있다"라며 "그러나 선교계 학교가 우리의 근대 교육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어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계 학교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라며 "배재학당은 체조와 교련 과목에서 미국 공사관의 경비대원과 해병대원이 교관으로 동원되었고, 학교 행사에는 한국 국기와 미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선교사들은 일요일 교회당예배를 강제로 시키고 교회에 불참한 학생을 퇴학시키기도 했으며 학생들은 기독교 중심 교육을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원산학사는 1883년 8월, 개항장 원산에서 개화파 관료들과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개량서당을 확대해 설립한 학교이고, 정현석이 그 중심에 있었다. 최 교수는 "원산학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라는 근거는 그 학교에서 기존의 전통 교육기관과는 달리 서구의 신지식을 교육내용으로 채택했다는 데에 있다"라며 "설립 목적도 전통적인 교육기관의 설립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했다.
최 교수는 "18세기 후반에 설립된 서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라거나 "일제강점기 이전의 조선은 자생적인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 하에 우리 교육 또한 일제식민지교육의 이식 때문에 비로소 근대화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소개했다.
동래무예학교는 1878년 전후 윤치화 동래부사 재임시절에 설립되었으나 정현덕이 1867년 6월부터 1874년 1월까지 약 7년간 동래부사로 재임하면서 외영을 설치하여 군사훈련과 무예교육을 실시하여 학교 설립의 기초를 제공했고, 정현석은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시기에 사또 지내
정현석과 정현덕은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같은 초계정씨 대제학공파였다. 횡성 출신인 정현석은 김해부사에 이어 진주목사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강릉에서 태어난 정현덕은 동래부사에 이어 이조참의, 대사성,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정현석은 김해부사(1870년 6월~1873년 12월)로 있으면서 김수로왕릉 가락루 중수, 파사석탑 이전, 허왕후릉 수리, 현충사 재건, 김해부 동헌과 객사(분성관) 중수를 했고, 진주목사로 재직할 때 <교방가요>를 저술했으며 이는 지금의 '의암별제'로 이어지고 있다.
정현덕은 동래부사(1867년 6월~1874년 1월)로 있으면서 동래읍성 수축과 공해관 건설, 동래 객사(봉래관) 개축을 했으며 동래별곡과 태평원 시비, 금강원 시비, 세한당의 현판 글씨를 남겼고, 2002년 '부산을 빛낸 인물 목민관(20세기 이전)'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학삼 교수는 "정현덕은 국방강화와 관련하여 동래읍성 수축과 관련된 녹봉 희사, 금정산성의 동문과 서문 재건, 만년대에 외영을 설치하여 무예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라며 "그는 동래읍성 수축에 스스로 1만냥을 내놓기도 했다"라고 소개했다.
최 교수는 "정현덕은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개항장인 부산포와 왜관을 관리하는 동래부사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자주국방을 위해 학문과 교육에 제대한 관심을 가졌다"라며 "1878년 부산에 설립되었다고 하는 동래무예학교의 바탕이 된 무예교육을 적극 추진했다고 한다"라고 했다.
최 교수는 "원산학사의 무예반에 동래부의 사례를 적용한다는 내용이 나온다"라고 했다. 이는 정현석이 고종한테 1883년 10월 14일, 원산학사와 관련해 올린 장계(고종실록)를 말하고, 그것은 "무예는 동래부의 규례를 본받아 출신과 한량 200명을 선발하고 별군관을 처음으로 두어 달마다 의무적으로 시험을 보아 시상하였다"라는 대목으로 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에 "윤치화 동래부사가 동래부 무예시험의 급료 등 무예교육을 수행하는 군사들의 처우와 관련해 동래부에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 최 교수는 "동래무예학교가 확실하게 언제 설립되었는지를 증명할 수는 없으나, 정현덕 동래부사의 국방력 강화 차원으로 무예교육을 추진한 결과로 (후임인) 윤치화 동래부사의 재임시기인 1878년 정도에 동래무예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래부의 무예학교를 참고로 하여 1883년 원산학사가 설립되었다는 내용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최학삼 교수는 정현덕·정현석을 비교 연구하게 된 계기에 대해, 2022년 11월 인제대 그랜드가야포럼에서 했던 "정현석 김해부사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발표가 경험이 되었다고 털어 놓았다.
당시 발표가 끝나고 난 뒤, 어느 선배 연구자가 한 부분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후 최 교수는 인터넷에서 '정현덕'과 '정현석'을 혼동해서 써 놓았던 글을 그대로 인용했던 게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이후 선배 연구자에게 전화를 드려 '오류를 확인했다. 제가 인용한 신문기사가 정현석이 아니라 정현덕에 대한 내용을 잘못 언급하고 있었다'라고 말씀드렸다"라며 "하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아 두 인물에 대한 비교 연구를 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최학삼 교수는 김우락 김해문화원장, 정영도 김해향토사학자, 전재문 부산강서문화원장, 배종진 향토사연구소장 등의 도움을 받아,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시기에 사또를 지낸 정현석·정현덕 관련한 사진과 문헌 등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