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이 그토록 힘들어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저 교사를 '최고의 직업'이라고 여겨왔는데, 우리 교육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 추석 때 학부모 등 주변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인사말이다. 학부모 민원 등에 시달린 교사들의 사망 사건이 잇따르자 교권 확립을 바라는 여론이 비등해졌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학교 주변에는 교권 보호에 앞장서겠다는 학부모단체의 현수막도 내걸렸다.
여론은 법 제정을 추동했다. 지난달 15일, 국회에서도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과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등 이른바 '교권 보호 4법'이 전격 통과됐다. 학부모의 무분별한 아동 학대 신고나 악성 민원을 차단하고, 교권 침해 학생에 대한 조치를 담고 있다.
학교장이 교사의 교육활동 침해행위를 축소하거나 은폐할 경우, 징계를 받는다는 내용도 있다. 학교장의 책무성을 강화한 것이다. 또, 교육활동에 관련된 소송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하기 위한 공제사업도 추가됐다. 학교안전공제회 등에 위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물론, 여론에 떠밀려 급조된 까닭에 보완해야 할 대목도 눈에 띈다. 생활지도 등 교육활동의 범위와 기준이 모호해 자칫 사사건건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 교권 보호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선 아동복지법과 아동학대처벌법 등도 동시에 손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교권 보호'라는 사회적 합의... 교사에게 돌아온 공
이번 일로 교권 보호가 공교육의 정상화에 필수 요소라는 점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다. 교권의 확립 없이는 아이들의 학습권도 보장될 수 없음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교권과 학생 인권을 상충하는 것인 양 프레임화한 현 정부의 억지 주장은 여론의 지지를 받기 어렵게 됐다.
이제 공은 우리 교사에게 돌아왔다. 교권 확립을 위해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때다. 이는 병아리가 껍질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동시에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스승과 제자 간 교육의 본령을 예시할 때 흔히 사용되는 사자성어다.
일부 학부모와 아이들로부터 무시로 침해받는 교권에 대한 여론의 성찰과 국회의 법 제정 노력이 '탁(琢)'이라면, 생활지도와 수업 능력 개선을 위한 교사들의 노력이 '줄(啐)'이다. '탁'의 움직임이 시작됐으니, 화답하듯 '줄'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또한 교육의 본령이랄 수 있다.
교권 보호는 교권 확립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법적으로 교권을 보호한다고 해서 교권이 저절로 확립될 리 만무하다. 교권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교사 스스로 축적되고 발휘되고 확고해지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은 것이다.
교권은 '교사의 권리'를 줄인 말이다. 한편, '교사의 권위'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교권의 중의적 의미는 교사의 권리를 위해 권위가 바로 서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이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교사가 부르대는 권리는 자칫 그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교사라면, 아무리 되바라진 학부모라도 그를 함부로 대하진 못한다. 대개 학부모의 민원은 학교생활에 대한 자녀의 불평불만으로부터 시작된다. 교사를 향한 아이의 뒷담화가 학부모에게 전해져 불신을 키우고, '금쪽같은 내 새끼'를 위해 온갖 꼬투리를 잡아 교사를 욕보이는 메커니즘이 작동해 온 것이다.
학부모의 막무가내식 꼬투리 잡기는 주로 생활지도 방식이 빌미가 된다. 듣자니까, 초등학교에서는 지도 과정에서 '아 다르고, 어 달라' 아동 학대로 비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차라리 방임하는 편이 신변에 안전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지경이다. 가정교육의 부재로 인한 문제 행동을 학교 교육에 책임을 떠안기는 꼴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나마 중고등학교의 경우는 나은 편이다. 교육의 중점이 생활지도에서 학습지도로 무게중심이 옮겨져서다. 코로나 격리 등으로 초등학교 시절 기본적인 생활 습관이 형성돼 있지 않은 요즘 아이들이 상급 학교로 진학했을 때 벌어질 상황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긴 하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생활지도와 학습지도를 칼로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없다. 영역과 목표는 다를지언정 동시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까닭이다. 무엇보다 일과 중 교사가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 대부분이 교과 수업이어서 학습지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활지도가 이루어지게 된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학습 효과는 물론 생활지도 역시 겉돌 수밖에 없다. 수업을 통해 교사는 아이들의 적성과 태도, 성향 등을 파악하고, 반대로 아이들은 교사의 역량과 자질을 내심 평가한다. 교육이란 수업을 통한 상호작용을 일컫는 말이다.
교사들이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야 하는 이유
누구나 교직에 첫발을 내디딜 때 가슴에 새기게 되는 소명이자 철칙이 하나 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교사는 수업으로 말한다는 것. 수업으로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증명해 내지 못하면 교사로서 권위를 존중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한, '공부'는 의무다.
교사에게 '공부'란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라기보다 늘 아이들과 함께하려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애쓰는 것이다. 하여 일방적 강의식 수업은 더는 학교 교육에 어울리지 않는다. 족집게처럼 핵심을 짚어주는 효율적인 수업은 노트북과 태블릿 피시만 켜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효율성과 재미로만 치면, 학교 수업은 결코 인터넷 강의를 넘어설 수 없다. 스마트폰을 몸에 일부로 여기고 자극적인 유튜브 콘텐츠를 교과서 삼는 아이들에게 지식 전달을 위한 강의식 수업은 하품만 나오게 할 뿐이다. 인터넷 강의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학교 수업은 필패다.
노파심에 한 마디 얹자면, 요즘 교사 중엔 유명 인터넷 강의를 흉내 내며 수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터넷 강의를 반복 시청하면서 수업 준비를 한다고 고백하는 교사도 있다. 그렇게 한들 '2등'일 수밖에 없고, 인터넷 강의에 목매단 아이들의 공부 습관을 돌려세우지도 못한다.
인터넷 강의를 '복제'한 수업으로는 교권을 바로 세울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수업의 방식부터 목표까지 혁명적으로 바꿔내야 한다. 교사 스스로 학벌 구조와 대입 제도를 핑곗거리 삼을수록 학교 수업은 인터넷 강의의 '짝퉁'으로 전락하고, 교권은 더더욱 추락하게 될 것이다.
이제 학교 수업은 다양한 주제로 교사와 아이들이 서로 질의 응답하며 소통하는 자리여야 한다. 교사가 질문하고 아이들이 답하는 수업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이 질문하고 교사가 답하는 수업도 낡았다. 아이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수업이라야 진짜 수업이다. 교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조언하는 것으로 족하다.
수업이 바뀌면 사제 간에 신뢰가 쌓이고, 신뢰가 쌓이면 종국에 교육이 바뀐다.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지만, 이 또한 줄탁동시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오매불망 제도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며 교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공교육의 개혁은 백년하청이 될 것이다.
물이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 교육개혁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것도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의 하향식 개혁이 아니라, 전국의 교사들이 개혁의 주체를 자임하고 여론이 든든한 원군이 돼주고 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하는 법, 교사들이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