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전환연구소는 2주간(9월 10일~25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후 급변하고 있는 유럽사회의 에너지·기후 관련 현장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지역과 마을 단위로 전환의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다양한 도시와 장소, 연구기관, 의회 등을 방문합니다. 이를 통해 실제로 유럽사회의 성과와 여전히 남은 과제와 한계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기자말] |
도시가 녹색성장을 통해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마리에케 반 두르닉(Marieke van Doorninck)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째, 녹색성장이 내세우는 대안기술은 비용이 비싸고, 에너지가 많이 든다. 둘째, 녹색기술은 지구 일부지역에만 매장되어 있는 희소금속에 의존하는데, 이는 또다른 생태 파괴, 노동 착취를 야기하고 있다. 셋째, 녹색성장의 주체는 기술력이 있는 소수의 기업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민주주의를 저해한다. 즉, 녹색성장은 고소득층에게는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암스테르담 시의 모든 사람과 지구 전체를 위한 안전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없다.
마리에케 반 두르닉은 2018년 5월부터 2022년 6월까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의 지속가능성, 도시개발 부문의 부시장으로 복무했다. 2020년 암스테르담 시는 코로나19 이후 도시 재건의 방안으로 '도넛 경제 모델(Doughnut Economics model)'을 채택했는데, 두르닉은 이를 주도한 인물이다.
우리는 암스테르담 시가 도넛 경제 모델을 지향한다는 것의 함의와 배경이 궁금해 지난 9월 15일 그녀를 찾아갔다.
도넛 경제 모델은 영국 옥스팜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착안한 대안이론으로, 국가 경제의 목표를 GDP 성장에서 '도넛'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도넛'은 국가와 도시의 경제 시스템이 사회적 기초를 충족하면서도 생태적 한계를 넘지 않는 안전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의미한다.
넘어서는 안 되는 바깥쪽 원인 생태적 한계는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 책임자인 요한 록스트룀이 제시한 9개의 지표를 활용했고, 충족해야 하는 안쪽 원인 사회적 기초는 2015년 유엔이 발표한 '지속가능 발전목표'를 토대로 한다.
암스테르담의 도시 초상화 작업의 의미
부시장으로서 두르닉은 획기적인 온실가스 감축을 통해 기후 중립 도시로 전환을 꾀하면서도 사회적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도시여야 한다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달성하려면 몇 가지 요소를 바꾸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시스템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는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 모델을 만났다고 한다.
이를 실제로 채택하는 데는 코로나19가 큰 계기가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지구의 경계를 존중하면서 모든 시민을 위해 번영하고 재생 가능하며 포용적인 도시'라는 비전을 바탕으로 이러한 시스템적 변화의 선구자가 되고자 했다.
암스테르담 시는 먼저 케이트 레이워스와 함께 도시 초상화(City Portrait)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도넛 경제학의 글로벌 개념을 축소하여 도시 수준에서 혁신적 사고로 전환하기 위한 도구이다. 지역, 글로벌, 사회, 생태라는 네 개의 렌즈는 번성하는 도시(thriving city)가 의미하는 바의 각기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사회적 목표와 생태적 목표, 지역의 열망과 전 지구적 책임을 결합했을 때 도시가 전세계적 상호연결성 하에 도넛 안에서 번영한다는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 데이터를 취합하여 각 목표와 대비되는 도시의 현 상황을 조망하고 취약한 지점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도넛 모델은 또한 의사 결정 과정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참여시키고 시청의 부서 간 협력을 위한 자극제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는 시민들의 생생한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7개의 다양한 지역에서 시티 도넛 워크숍을 개최하였고, 시 공무원들과 시민들이 함께 번영하는 암스테르담을 위한 비전과 우선순위를 세웠다. 이를 통해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분야로 순환경제, 그 중에서도 건축, 식품과 유기물, 소비재 분야를 우선 과제로 선정하였다.
순환 경제를 실현하는 도시는 자원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사용하고, 사용 중에 최대한의 가치를 추출하며 수명이 다한 제품과 자재를 회수하고 재생한다. 워크숍을 통해 이를 위한 17가지 방향이 제시되었는데, 건축 분야부터 이행계획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도시 초상화 작업은 높은 주거비로 인해 암스테르담 시에 거주하는 세입자의 20%가 임대료를 지불하고 나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더 많은 주택을 짓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크게 증가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규 주택을 최대한 확보하고 사회주택을 활성화하면서도, 건축의 가치사슬 전반에서 배출량을 감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순환경제를 위한 암스테르담의 노력과 변화
암스테르담 시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도시의 남동쪽 바다를 매립했는데, 그 중에서 에이뷔르흐(IJburg) 지구의 한 섬을 시범사업지로 선정하고 건축 과정 전반에 걸쳐 개발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여러 결정을 내렸다. 자재를 운송할 때 저공해 연료로 운행되는 보트를 활용하도록 했으며, 해수면 상승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면서 지역 야생 동물을 해치지 않는 공정을 사용하여 기초를 마련했다.
목재건축이 확산되도록 지원하고, 자재 여권 제도 등 재활용 건축자재의 사용을 의무화할 방안을 모색했다. 생물체나 생태계 시스템의 구조와 기능, 원리와 과정을 모방한 생체모방(Biomimicry) 디자인이 건축에 통합될 수 있도록 이니셔티브를 활성화했다.
순환경제에서 기업의 역할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개발, 순환형 제품 설계, 사용 후 제품의 수거 및 고품질 처리를 통해 혁신하는 것이다. 시는 공공조달에 순환성 개념을 반영하여 기업의 변화를 유도하고, 기업과 기관 간의 혁신과 협력을 촉진하며, 표준을 설정하여 규칙을 부과하고, 세제를 개편했다. 이를 통해 시의 지향점에 맞는 로컬기업들을 발굴하고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제도를 통해 지원했다.
암스테르담 시는 시정의 이해관계자의 범위를 기업, 정부, 연구기관으로 한정하지 않고 커뮤니티, NGO, 중소기업 또는 스타트업으로 확대했다. 각 섹터별로 도넛 사고 방식을 실천할 혁신적 방법을 찾고 있는 체인지메이커들을 연결해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확산해 나갔다.
도시의 자원 소비를 '도넛'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을 설계하고 실행하려면 시 당국, 기업, 시민 등 많은 내부 및 외부 이해관계자의 동의와 의견, 협력이 필요하다. 도넛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설계 단계뿐 아니라 전환과정에 긴밀히 참여해야 하며, 보다 지속 가능한 선택을 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순환경제 영역에서 도넛 모델을 실험하면서 두르닉뿐 아니라 레이워스도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도넛은 촘촘히 설계된 청사진을 제시하는 탑다운 방식보다는 아래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도넛 활동들이 모여 힘을 결합하고 이를 토대로 위로 뚫고 가는, 소위 '버블링 업(bubbling-up)'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두르닉은 경제의 낙수효과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몇 년간의 도넛모델 확산 실험을 통해 더 확신하게 되었다. 도넛은 한 사람, 특정 정권에 의존해서가 아닌, 어떻게든 실천을 이어가는 시민들의 혁신을 통해 이어 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도넛 도시 선언 이후 변화에 대한 질문에 두르닉은 이렇게 대답했다.
"암스테르담 시도 아직 완전한 도넛 도시가 아니며, 가야 할 길이 멀다. 다만,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 하나임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변화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녹색성장을 믿는다. 이들을 비난하기 보다는 선택에 따라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또한 시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사회에서 시장과 정부는 비대해진 반면, 시민의 영역은 축소된 채 겨우 소비자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변화는 시장과 정부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시민의 자리를 다시 찾아와야 한다."
도넛은 규범적 모델이 아니며, 명확한 로드맵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도시를 조망하는 새로운 렌즈와 환경에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삶의 질을 보장하는 낙관적인 최종 결과를 제시한다. 암스테르담 시뿐 아니라 벨기에 브뤼셀, 뉴질랜드의 더니든, 미국의 포틀랜드와 오스틴 등 전세계의 도시들이 도넛 모델을 활용한 각자의 실험을 이어 나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