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태도는 앞으로 '블랙리스트를 대놓고 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의 국회 인사청문회 다음날이자 인사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된 지난 6일, 이른바 '블랙리스트 백서'를 만든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윤석열 정부의 이익에 반하는 콘텐츠에 대해 지원하지 않겠단 말을 (유 장관이) 노골적으로 하잖나"라며 이같이 지적했다.
'유인촌이 돌아온' 이날 오후 서울 도봉구 인근에서 만난 김 교수는 인터뷰 내내 단호한 목소리로 유 장관의 인사청문회 발언을 지적했다. 유 장관은 청문회 내내 '이명박 정부 문체부 장관 시절 블랙리스트에 관여했다'는 문제제기에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김 교수는 2017년 7월~2018년 6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의 민간위원이자 백서발간소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0권(약 6600쪽)에 달하는 백서 편집을 책임졌다. 그는 백서에 수록된 문서들을 일일이 짚으며 "이명박 정부 때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블랙리스트 조사·처벌 철저했다면 지금의 유인촌 없었을 것"
인터뷰 중 김 교수는 이명박 정부 초기에 작성된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 명의의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을 내보였다.
"단기간에 좌파 척결을 위한 전쟁을 하기 보다는 좌파를 대신할 건전 우파의 구심점을 신진세력 중심으로 조직화."
"의도적으로 (정책) 자금을 우파 쪽으로만 배정해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문화예술인 전반이 우파로 전향하도록 추진."
이 문건은 2008년 8월 27일에 작성된 것으로 기록돼있다. 유 장관이 2008년 2월 29일~2011년 1월 26일 문체부 장관을 지냈으니 그의 임기 중 작성된 것이다.
"이 문건을 들여다보면 이명박 정부는 '문체부 산하 예술위원회∙영화진흥회 등 핵심 기관에 많은 수의 좌파 실무자들이 근무해 청산이 필요하다'고 봤다. 또 '문체부의 지시만으로는 (좌파 청산에) 한계가 있으므로 위원장을 교체하고, 인적청산작업을 지속 감시·독려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문건대로 대대적인 인적 청산 작업이 이뤄졌다."
김 교수는 "국정원이 2017년 9월 11일 발표한 자료 '이명박 정부 시기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세력 퇴출 건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 참여' 등을 이유로 문화예술인들이 국정원에 의해 리스트에 등재됐다"며 "핵심은 정부 정책 방향성에 이견을 표출한 예술인들을 (이명박 정부가) 끊임없이 리스트업하면, 실제로 각종 지원사업에서 배제됐는데, 이 과정에 문체부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더구나 당시 국정원 아이오(IO, 정보담당관)가 문체부에 수시로 출입하며 국정원·문체부 간 밀접한 소통이 이뤄지던 시기"라고 지적했다.
이어 김 교수는 "백서에 담긴 증거 곳곳에는 문체부가 (이명박 정부의 지시를) 수행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내용이 다수 발견된다. 그런데도 유 장관은 '자신이 관련 자료를 보고 받지 않았고, 블랙리스트 존재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인가"라며 "유 장관이 이명박 정부에서 잘라낸 산하 기관장의 존재 자체가 블랙리스트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관련기사 : 유인촌이 자른 예술인, 유인촌 귀환에 "축하한다, 하지만..." https://omn.kr/25sqh)
김 교수는 유 장관이 '블랙리스트 백서는 일방적으로 쓰였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서도 "백서는 문체부 장관(당시 도종환)이 진상조사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전문 조사관들의 조사를 거쳐 작성됐고, 문체부 홈페이지에 검색되는 아주 공적인 신뢰도를 가진 자료"라며 "문체부 장관이 되려는 사람이 백서를 부정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에서 블랙리스트 조사위원회 활동이 더 적극적으로 이뤄져 확실히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이뤄졌다면 지금처럼 유 장관이 다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백서 들춰야 하다니... 서글프다"
김 교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 더 살벌한 검열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정부는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문제 소지가 있는 지원사업은 항목 자체를 없애고 (유 장관이 판단한 국익에 맞는) 정책을 신설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 장관은 지난 8월 2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 건 공산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라며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렇게 반박했다.
"유 장관이 말하는 국익의 기준은 무엇인가? 앞으로 '윤석열차'와 같은 작품은 해선 안 된다고 말한 셈인데 그 발언이야말로 정치적인 것 아닌가."
또 김 교수는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정치적이고 심지어 정치적 중립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그러한 의도를 갖고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이라며 "예술은 표현의 자유에 입각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것인데 유 장관의 '국익 발언'은 현 정권에 비판적인 작품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한 것으로 읽힌다. 그게 프로파간다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당분간 생계 걱정 등으로 순수예술계가 고사할 것 같다"며 "창작자들 입장에선 소신껏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기로 하더라도 작품이 정치적 논란으로 비화되는 부담을 갖게 되고, 연기자들도 작품 선택에 있어 제약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 정부의 집요한 사찰과 피해 경험을 문화예술인들이 모두 공유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입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았다"며 "이번 정부에서 (유 장관의 복귀로) 후속조치가 있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후 블랙리스트 백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 교수가 씁쓸한 듯 "서글프다"는 말을 내뱉었다.
"이 백서를 다시 들춰가며 (진실을) 따지는 날이 왔다는 게 참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