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발발 75주기인 10월 19일, 당시 군경에 학살당한 박채영, 박창래, 이성의, 심재동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허정훈 판사)은 여순사건 이후 진압군이 법률 규정을 무시하고 이들을 "무차별 체포 구금해 비인도적 취조와 고문을 자행한 뒤 정치·사상범이란 이유로 살해했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7월 17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제1형사부는 여순사건 관련해 '포고령 위반' 등의 혐의로 군경에 학살당한 박창래(1914~1949), 이성의(1925~1950), 박채영(1909~1949), 심재동(1913~1950)에 대한 재심대상 판결에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다만 재심 청구 피고인 중 박창래의 큰아들 박회순(1932~1950)은 "재심 청구권자가 아닌 자에 의해 재심 청구가 돼 부적법하다"며 '기각' 판결했다.
박창래·박채영·이성의·심재동의 억울한 사연
이번에 무죄 판결을 받은 박창래와 박채영은 일제강점기에 여수수산학교 독서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항일독립운동가다. 박창래는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거쳐 지난 2007년 그 사실이 인정돼 뒤늦게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 하지만 박채영은 아직 독립운동가로 공식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다.
여순사건 당시 박창래는 화양면 인민위원장에 선출돼 약 사흘쯤 활동했다. 그는 여순사건 직후 특경대에 체포돼 그해 12월 13일 광주호남계엄지구사령부 호남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죄'(제77조), 포고령 제2호 위반죄(국권문란) 등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듬해 1월 13일 군경에 의해 여수 만성리 용골(현 만성리 형제묘 일대)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학생이던 박회순은 단지 박창래의 큰아들이라는 이유로 체포돼 포고령 제2호 위반죄(공중치안질서문란)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전주형무소를 거쳐 김천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께 김천지구 CIC 분견대, 헌병대,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살해당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상(제424조) "유죄 선고를 받은 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배우자, 직계친족, 형제자매가 재심청구권자"여서 조카가 재심청구를 한 것은 부적법하다면서 '기각' 판결했다.
여순사건 당시 박채영은 여수인민위원회 위원과 여수인민위원회가 발행한 <여수인민보>의 편집인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판결문에 나오는 유족의 진술 내용에 의하면 여순사건이 터졌을 때 박채영은 '결핵'으로 집에서 투병 중이었다. 그런데 지역사회에 '애국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 14연대 군인들이 민심을 얻고자 데려간 것이었다. 박채영도 박창래와 마찬가지로 호남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에 의해 '내란죄,' '포고령 제2호 위반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아 1949년 1월 13일께 여수지역 군경에 의해 만성리 용골에서 살해당했다.
이성의는 여순사건 당시 승주군 서면 동산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런데 '직장 세포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군경에 체포·연행돼 호남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1950년 한국전쟁 무렵 대전형무소에서 살해당했다.
심재동은 여순사건 당시 '월내리 인민대회에 마을주민들과 함께 참석했다'는 이유로 체포·연행돼 호남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에 의해 '포고령 제2호 위반죄(공중질서치안문란)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공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50년 7월 9일께 공주 CIC 분견대, 공주파견헌병대, 공주 지역 경찰 등에 의해 왕촌 살구쟁이에서 살해당했다.
무차별 체포·연행·구금·고문·살해... 불법성이 인정되다
재판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군경 등이 대한민국헌법(제헌헌법)과 구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인신구속 관련 규정('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구속당할 자의 성명 및 피의사건을 기재한 재판소가 발한 구속 영장 없이는 신체의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는 규정 등)을 무시하고 피고인들에 대해 무차별 체포·연행·구금·고문·살해를 했다면서 불법성을 인정했다.
아울러 "경찰 등 공무원의 이 같은 불법체포·감금"은 구형법(제194조)상 "특별공무원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며 '재심 개시'를 판결했고, 7월 심리 과정에서 검찰은 영장을 비롯한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고 '무죄 선고'를 요청(8월 29일)했다. 마침내 10월 19일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에 대해 박창래의 손자 박은택씨는 "(할아버지가) 오래전에 독립 유공자로 인정됐지만, 오늘 공식 무죄 판결이 나와 감사하다"며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이후 할머니, 자녀, 손자 등이 오랜 세월 진로가 막혀 본의 아니게 피해를 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긴 세월을 보내고 시대가 변해 많은 분의 수고로 이런 판결이 나왔다"며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을 품고 사는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없었으면 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편, 재판부는 호남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가 피고인들에게 적용한 '포고령 제2호'는 미군정이 제정한 것이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1948년에는 시효가 끝나 적용이 불가하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포고령 제2호의 적용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라 죄형법정주의와 헌법에 위배돼 '무효'라 판시했다. 이번 박채영·박창래 등 4명의 재심 무죄 판결이 나오면서 여순사건 당시 무차별 학살당한 분들의 재심 사건이 잇따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