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관련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세운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회식 중 상사가 직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의혹이 일고 있다.
ETRI와 윤영찬 의원(더불어민주당·경기 성남시 중원구)에 따르면, 지난 5월 31일 오후 대구 수성구 수성못 인근에서 ETRI 대경권연구센터 보직자 회식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노래방으로 이동했다.
오후 11시 45분쯤 피해자 A씨는 센터의 발전을 위해 실장들의 역량 분발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센터장님 눈을 가리지 말고 똑바로 하자"라고 발언했다. A씨는 잠시 후 다른 실장에게 "실 운영을 똑바로 하는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고충처리 신청 후 시작된 2차 가해
이때 센터장 B씨가 A씨에게 달려들어 몸을 누른 후 왼손으로 목덜미를 잡고 오른손으로 A씨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고 한다. 당시 함께 있던 실장들이 말리면서 폭행은 중단됐으나 폭행을 당한 A씨가 고충처리를 신청하자 2차 가해가 시작됐다.
A씨는 "다음날인 6월 1일 고충처리위원에게 면담을 신청했으나 고충처리위원 C씨가 '네가 폭행을 유발한 것 아니냐'며 단정적으로 얘기했다. 다른 고충처리위원으로 바뀌고 나서야 공정하게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지난 9월 이뤄진 원장과의 면담에서도 사건을 무마 시도가 있었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A씨는 "원장이 '경상도 사나이끼리 술 먹고 그럴 수도 있지'라면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윤영찬 의원실에 따르면 A씨가 처음 도움을 받고자 했던 고충처리요원 C씨도 당시 현장에 있었던 참고인들의 진술을 왜곡해 "A씨가 10분간 쌍욕을 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5분간 욕을 했다"고 바꾸는 등 사건을 축소하거나 왜곡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참고인과 주변인들로부터도 "A씨는 술버릇이 좋지 않다", "A씨가 쌍욕을 해서 사건이 발생했다", "A씨는 조직 부적응자다"라는 등 2차, 3차 가해를 받았다고 재차 주장했다.
이어 "사건이 발생한 이후 대인기피증이 생기고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했다. 신경과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며 "B씨가 왜 폭행을 행사했는지 이유도 알 수 없어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직장 내 갑질폭력의 경우 취해야 할 신속한 조사와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 가해자의 인사조치 및 직원교육 등 법적 제도적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보직자 회의 등에서 지속적으로 가해자를 대면하고 지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집단적 괴롭힘이 반복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향한 회유와 압박" - "재발 방지 시스템 만들겠다"
A씨는 결국 윤영찬 더불어민주당(경기 성남시중원구) 의원실에 도움을 요청했다. 윤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기로 하자, ETRI는 지난 19일 가해자 B씨에 대해 뒤늦게 보직해임을 했다. 그러나 가해자와 여전히 한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윤영찬 의원은 24일 오후 열린 국회 과방위 국정감사에서 방승찬 원장에게 "지난 5월 하위 보직자의 안면을 여러 차례 가격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안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원내에서는 개인적으로 벌어진 일로 처리하려고 한다"며 "이런 문제가 빈번하게 벌어진다면 이런 고민이 많은 연구자들이 떠나갈 것"이라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특히 윤 의원은 "더 큰 문제는 연구기관의 자체감사 조직인 고충처리위원회의 조사, 면담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회유와 압박이 있었다"면서 "고충처리위원이 상위기관이나 외부 민원을 넣어봤자 소용없다는 말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폭행 가해자에 대한 처분은 인사권과 관련된 사안이기에 원내에서 감사한다고 하는 순간 외부 감사는 종료된다"며 "기관이 폭행하라고 사주한 것도 아니라는 말로 기관 내 상·하급자 간 발생한 사건을 개인 간의 일로만 처리하려 한다"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방 원장은 "이런 일이 없도록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