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과 가을의 교환은 최대교역이다'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연꽃 하나를 보기 위해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고 덕진연못으로 출근한 시인. 무려 여섯 번의 여름을 거쳐 맑고 향기로운 시를 모아 시집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하다>를 선보인 안준철 시인이다. 26일, 군산의 작은서점문화기획으로 그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시낭송가(채영숙, 한국시낭송예술원회원)의 찬조출연으로 안 시인의 시 <밥>이 낭송되었다. '꽃 진 자리 / 오롯이 남은 연밥에 박힌 / 작은 눈알들 // 다 보았겠다 // (중략) // 연꽃밭에 다녀와서는 / 단물이 나올 때까지 / 밥알을 오래 오래 씹어 먹었다'. 낭송가의 애절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시는 새벽녘 연꽃봉우리 터지는 소리처럼 아름다웠다.
쓸쓸한 가을을 좋아하여 이리저리 안부를 묻고 다니느라 결코 쓸쓸할 일이 없는 시인. 고요를 너무 좋아하여 지극한 적막에 이르는 자전거의 둥근 바퀴가 제 살이 된 시인. 기관지확장증의 기침도 붉게 개화한 꽃으로 뱉어내는 시인, 안준철 시인에게서 염화미소를 배운 시간이 행복했다.
안 시인은 1992년 제자들에게 써준 생일 시를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30년 교직생활, 20여 년 담임을 맡은 반마다 생일을 맞은 학생들에게 써준 생일 시가 거의 1000여편에 이른다고 했다.
한 학생의 생일 시를 쓰기 전에 약 한 달간 학생에게 쏟는 정성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가정과 학교에서 문제가 있는 학생일지라도 사랑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경험을 주고 싶었다는 시인. 시인의 시 작품 이전에 지극한 선생의 사랑과 정성에 감동했다.
강연회를 준비하면서 새로 나온 시집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하다>를 여러 번 읽었다. 연꽃 하나의 소재로 시집을 냈다는 얘기를 듣고 호기심이 일었다. 한 가지 대상을 꾸준히 지켜보는 일, 매양 같은 모습을 다르게 보는 눈, 하찮은 움직임에도 다른 각도로 귀를 기울이는 일이 글 쓰는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시인의 말에 청중들은 자석처럼 끌려갔다. 특히 강연 전 시인이 불러주었던 노래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으로 시작된 만남은 감미로운 인연의 서막이었다.
가을이라 가을 시 한편 <쑥부쟁이> 낭독으로 강연이 시작되었다. 자전거로 한 시간은 달려가서 보고 와야만 할 것 같았다는 쑥부쟁이. 초승달 같은 꽃 이파리를 보자 혹시라도 쑥부쟁이는 나보다 좀 쓸쓸한 사람이 제 앞에서 쭈그려 앉아있다가 가주길 원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시인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어떤 사소한 사물일지라도 낮추어 예를 다하는 그의 마음길이 훤히 보였다.
이런 마음을 나만 안 것은 아니었다. 강연회에 안 시인을 추천한 지인은 국어선생님으로서 수업시간에 안 시인의 <오솔길에서>란 시를 낭독해주고 시 한 구절을 밑줄긋고 학생들과 시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무심결에 따르릉 해놓고/엄지손가락과 나와 자전거가/뒤늦게야 숨을 죽인다'. 나와 자전거까지 물아일체되어 따르릉 소리를 듣지 못했던 어느 할머니(타인)에 대한 배려를 표현한 시. 시란 현란한 어떤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 그 맘을 그대로 쓴 글이라고 설명했단다.
아침 연꽃 영접하고 돌아오는
건지산 숲속 오솔길
할머니 한 분이 앞에 걸어가신다
따르릉 따르릉
할머니는 못 들으신 듯하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무심결에 따르릉 해놓고
엄지손가락과 나와 자전거가
뒤늦게야 숨을 죽인다
(하략)
시인은 <겨우 핀 꽃>이란 시를 통해 본인을 일컬어 '겨우 시인'인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시작법(詩作法)에 대해 말하는 그는 결코 '겨우'라는 수식어가 합당치 않았다. 시인은 사물을 과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사물이나 상황이 준 느낌을 그대로 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일을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저 고운 빛이 어디서 왔을까/조금은 알 것도 같다//곱지 안아서/고울 수 없어서//애쓰는 마음에서 왔다는 것을'. <결핍>이란 시를 통해서 시인 자신의 곱지 않은 마음, 진실하지 않은 절망의 마음이 투영되었다 했다.
애쓰는 마음을 통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이 고와지고 진실될 수 있음을,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라도 정말 진실해져야 함을 전해주었다. 진실한 마음에서 쓴 시는 독자들이 먼저 알아보고 소통되는 기쁨을 말했다.
그런 진실을 담아 쓰여진 애련시(愛蓮詩)의 총합이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하다>에 담겨있었다. 연꽃을 보러 간 사람의 서두름을 탓하지 말고 오히려 잘 보이고 싶어하는 연꽃 마음도 있으려니 달려간 걸음을 잠시 서성이자고 말하는 시인. 진흙밭 속에 있는 연꽃을 사진기로만 담아오기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시인.
연꽃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지워지는 길이 없어서 행복한 시인. 그리고 매일 아침 연꽃 보러가는 시인을 두고 한 번도 말린 적이 없는 덕이 있는 아내를 둔 시인. 꽃이 다 져서 가을이 오고 아름다운 작별을 고할 때까지의 여정을 담아낸 시들은 마치 한 편의 사랑 영화를 보여준 듯했다.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동시에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이란 말이 떠올랐다. 시인이 대하는 모든 사물에 쏟아지는 지극한 정성에 쉼이 없으니 진실된 시가 쓰여지지 않았을까. 그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연꽃 연작시들을 읽으며 혼탁하고 불안한 현대인들의 일상 사이사이에 시 한 자락만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안 시인께 큰 박수를 보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