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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가이자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이기도 했던 고길섶이 고향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 고향 신문 등을 만드는 등 지역 문화 일을 하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냈다.

이번에 낸 책은 <소수문화들의 정치학> 같은 그의 문화이론서가 아니라 소설책이다. 그것도 지난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1주기 전에 이태원 얘기를 쓴 소설책 <엄마가 말할게>다. 이태원 참사에 관해 국내에서 나온 최초의 소설이다.

고길섶이 같은 편집위원을 할 때 <우리시대의 언어게임>이란 책을 썼는데 그의 이력을 진작에 알아봤으면 작가가 보내준 <엄마가 말할게>란 소설책을 보고 '웬 소설까지'라고 놀라지는 않았을 게다. 길섶에서 태어났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 고길섶이니 길섶에서는 오만가지 일들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대학을 나오고 문화비평가 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고길섶은 그의 책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2002년부터 2년 동안 핵폐기장 문제를 둘러싸고 끈질기게 이어진 부안항쟁에서 많은 일을 한 사회활동가이기도 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유독 고생했던 지난 여름 벌어진 잼버리 스카우트 대회는, 새만금 간척사업, 핵폐기장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결과였다.

20년이 넘은 부안항쟁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마는, 핵폐기장 문제는 그의 처녀작 <엄마가 말할게>에 나오는 '앞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희미하고 흐릿해진 기억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환영이 아닌 진짜 실재로서의 앞그림자를 밟으며 살고 있다.

실재로서의 앞그림자
 
10.29이태원참사 1주기를 앞둔 지난 10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출구 부근 참사 현장에서 ’10.29기억과 안전의 길' 조성 기자회견이 권은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미술가와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권은비 작가가 취지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골목길 입구 바닥에 '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할 이름들이 있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 "기억과 안전의 길" 10.29이태원참사 1주기를 앞둔 지난 10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출구 부근 참사 현장에서 ’10.29기억과 안전의 길' 조성 기자회견이 권은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미술가와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권은비 작가가 취지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골목길 입구 바닥에 '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할 이름들이 있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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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눈은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작가 고길섶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 혁진이로 나온다. 소설 속에서 '혁진의 우주는 앞그림자들, 그것도 난삽하고 어지러운 앞그림자들로 충만한 세계'라고 하듯이, 우리는 환경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난삽하고 어지러운 앞그림자들이 바글바글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앞그림자' 얘기를 먼저 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림자가 빛의 반대방향으로 늘어지는 사물의 그늘이라면, 빛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눈 방향을 따라 사물 전면에 엇갈려 나타나는 것을 혁진은 앞그림자라 부르곤 했다. 그림자가 사물의 배후에 어둡게 깔리는 우주의 보편적 실재라면, 앞그림자는 몸체는 투명하되 그 경계는 회색이거나 사물의 본색으로 드러나며 눈이 나빠 사물이 혼탁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환영이 아닌 진짜 실재다(소설책, 22쪽)"

이 말은 주인공 혁진이가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그가 만든 말이지만,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그림자는 단순히 연속의 시공간을 거슬러 이어지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 사건은 이태원 사건의 앞그림자였다고 할 수도 있다. 빛의 방향이 이태원을 가리킨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 그것도 모순적인 것들이 겹쳐 나타난 것, 엇갈린 것만은 사실일 테다.

소설의 스토리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서영이란 여자가 친구 세주와 함께 이태원에 놀러 간 율희가 죽자 또 다른 주인공 혁진, 동탁과 함께 장장 두 달이 넘게 부안 줄포에서 서울 이태원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가는 동안 벌어진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월호 사건도 그렇지만 이태원 사건도 아직 진상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소설 속에 나오듯이 젊은이들은 그저 배 타고 수학여행 놀러 간 것 뿐이고, 이태원에 할로윈 축제에 놀러 간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사건이 아니라 그저 사고일 뿐이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었다.

이태원 참사 당일 초저녁 6시 34분 압사 위험을 언급하면서 최초로 112 신고가 접수되었지만, 10시 15분 10명 정도의 압사 사고가 날 때까지 경찰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최초의 112 접수시간과 압사사고 최초 시간 사이의 간격은 무려 3시간 45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KTX로 서울 – 대구를 왕복할 수 있고 목포에서 출발한 고속버스가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경찰은 아무런 통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소설 속 서영은 말한다.

"서울경찰청 집무실에는 서울 어느 구역이든 직접 볼 수 있는 CCTV가 설치되어 있고 112 신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무전기가 16대나 설치되어 있었어요. 그 날 청장은 집무실에 12시에 출근하여 저녁 8시 33분께 퇴근했어요. 촛불시민들의 용산집회가 끝난 뒤 가버린 거죠. 참사 1시간 전에 이태원 인파 관련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안 취했어요. 소름이 끼쳐요... 여기에 경찰청 차원에서 지시된 어떤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해 보여요. 하나는 촛불시민으로부터 대통령이라는 권력자를 보호하겠다는 과잉된 태도였고, 그래서 경찰들을 용와대로 배치한 거잖아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약사범 단속이라는 성과에 꿰맞추려다 보니 경찰을 이태원에 투입하면 안된다는 계획된 시나리오였겠죠... 사태의 수습과정도 참혹했잖아요? 죽은 젊은이들부검부터 하겠다고 두 번 죽이려 했던 정권, 심지어는 희생자의 물병도 검사했다면서요? 만일 마약의 흔적이라도 나왔다면 희생자들을 마약에 미쳐 죽었다고 몰고 갔을 거 아녀요? 미친 거 아녀요? 그게 국가의 책임자들이 할 일이 아니잖아요? 참사 이전이나 이후 모두 부조리로 이어지고 있어요. 권력의 부조리가 낳은 참사!"(소설책, 220 쪽)


묻혀 있는 진실
 
고길섶 장편소설 <엄마가 말할게>
 고길섶 장편소설 <엄마가 말할게>
ⓒ 섶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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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스토리 배경은 이렇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 보수 내지 태극기부대 같은 극우 세력 빼놓고는 대부분 '국가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 사건 이후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진실과 실재가 '가짜뉴스'로 둔갑하기 일쑤다. 세월호의 진상, 천안함의 진실 등 한국사회는 앞그림자만 보이는 혼탁한 세상이다. 진실은 이제껏 한 번도 인양된 적이 없고, 팽목항 앞바다에, 해밀턴 호텔 그 좁디좁은 골목길에 수장되어 있고 묻혀 있다.

이태원만 그러랴. 최근 세계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니아-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 역사 자체가 잘 보지 못하보는 소설 속 주인공 혁진의 눈을 닮았다. 언론은 앞그림자의 실체를 밝히기는커녕 수천 명 아이들의 죽음 등 센세이셔널한 소재 내보기에 바쁘다. 이 죽음의 사건에서 '국가의 부재'나 '제국주의' 문제는 거론되지 않는다.

'국가의 부재'만 하더라도 어디 죽음이 세월호 뿐이며 이태원 뿐인가. 식민지 시절은 어땠고, 한국전쟁 때는 또 어떠했는가.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광주 아파트 공사장 붕괴 참사, 그리고 이어지는 아파트 붕괴는 또 뭔가.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 니이가타 현 사도시 사도광산은 무엇이고 경산 코발트 광산의 억울한 죽음은 무엇인가. 한국사회가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넘어온 죽음의 앞그림자들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인지 작가 고길섶은 소설책 11장 '공화국'에서 동물공화국을 이야기하고 9장 '혼체'에서 실제로 이태원에서 억울하게 죽은 혼체들을 불러낸다. 작가는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과 꿈을 생생하게 들려주기 위해 직접 현장 조사를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비판의 화살을 현 정부에게로 돌린다. 사실, 말이 공화국이지 우리는 공화국(共和國의) '화'(和)자와 다르게 벼, 곡물 화(禾)를 함께(共) 나누며 사는 세상에 살지 않고 있다. 공화국은커녕 절대 불평등이라고 말할 정도로 곡물, 벼 화(禾)를 소수가 독점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소설 속에 나오는 '동물공화국'은 '공화국'이 아니다.

한 편으로 소설의 이야기를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삼보일배와 삼보일배하는 무리들을 미행하는 이야기로 보면 그리 시선을 끌 만한 내용은 없다. 하지만 소설은 '공화국'이나 '혼체' 등에서 소설의 모습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다큐소설이 아니라 환상과 풍자를 얹어 놓은 소설로 변신하는 것이다. 저승이 이승의 앞그림자이고 과거가 현재 미래의 앞그림자이며 동물이 인간의 앞그림자 역할을 하는 모습을 소설 속 여기저기에 심어놓는다. 그리고는, 인간은 사라지고 동물의 왕국이 되어 버린 한국사회에서 소설 속에서나 실제에서나 검국독재에 대한 탄핵심판을 외친다.

소설에서 유독 11장 '공화국'만 현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6장 '웃프공', 7장 '도둑놈기술' 등 소설은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을 비판한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인 율희의 친구 세주의 아버지는 소설 속에서 법무부 장관이다.

이 소설이 이태원 참사에 대한 최초의 소설이라는 미덕과 함께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향토사학자, 지리사학자를 넘어서 지리정치학까지 넘실대는 작가의 이야기다. 동물검국 이야기를 하는 '공화국' 장에서 '독재정권에 내성화된 정치검찰의 DNA' 구절처럼 날카로운 현실인식만이 아니라 부안항쟁은 말할 것도 없고 동학혁명 이야기, 송시열 이야기, 구마모토 이야기, 소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이태원이라는 지명에 담긴 의미와 그 역사 등 작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삼천포로 빠지면서 스토리 중간중간에 들려준다. 부안 줄포 이 지역에 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소설 속에서 공무원이었던 율희가 죽어갈 때 율희는 세주에게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다. 내용은 세주와 서영의 대화다.

"그 날 율희가 저에게 문자로 남긴 말이 있어요. 이태원에서 만났을 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피식피식 웃기만 했는데, 그 말이 지워지질 않아요
무슨 말인데
사랑 이후에 가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 이후에 가는 곳도...사랑이다?
네, 엄마
서영은 충격을 받아 곧바로 실신했다(소설책, 308 쪽)"


이 이야기는 소설 첫 장 아스타나 고분전 관람기 이야기에 나온다. 아스타나 고분전을 본 한 블로거가 자신의 블로그에 포스팅한 문장, '죽음 이후 가는 곳이 사랑이다'를 율희가 패러디한 문장이 '사랑 이후에 가는 것도 사랑이다'라는 문장이다. 율희의 엄마 서영이 무슨 뜻일까 고민했던 것처럼 필자도 그 뜻이 알쏠달쏭하다. 죽지 말았어야 했고,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모든 것이 끝난 죽음 이후에 어떻게 사랑으로 간다는 말인가?

양희은 노래 중에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있다. 그 노래 가사 중에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가 있다.

율희가 내뱉은 말의 뜻을 작가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지만, 끝난 뒤에도 사랑은 이어지고 사람을 사랑하다는 일이 참으로 쓸쓸한 일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 159명을 사랑한다는 일이 너무도 너무도 쓸쓸한 일이지만, 엄마 서영은 말한다.

내 너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겠노라고, 그래서 엄마가 말하겠노라고, 그래서 죽었지만 사랑 속으로 가라고. 내 너를 사랑 안으로 데리고 가겠노라고. 사랑의 'ㅅ'자도 모르는 소설 속 동물 개돼지들에게 엄마가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말하겠노라고'. 널 위해, 너희들 159명을 위해, 생전에, 빛나던 모든 것을 찾아 돌려주겠노라고.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대구가톨릭대학교 글로벌문화컨텐츠학과 교수(노어노문학)입니다.


태그:#이태원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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