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을 더 늘리면 물가 때문에 또 서민들이 죽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물가가 확장적 민생 재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인지, 물가가 잡히면 돈을 푼다는 말인지, 그것도 아니면 물가부터 잡고 돈을 푼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건전재정 중독에 빠진 정부가 돈을 안 쓰고도 민생 경기를 부양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물가란 놈을 올린 주범은 누군가?
민생 경제는 금융 위기에 준하는 비상 경제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물가 대란은 쓰나미가 되어 중산층과 서민을 집중 타격하고 있다. 정부가 물가 상승 압력이 높아질수록 공공요금을 더 거칠게 올리는 이유를, 건전 재정을 강조할수록 재정이 더 불건전해지는 이유를, 민생을 지원한다는데 민생 곳간이 더 털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하여 '공공발 물가 대란'이 난독증을 유발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물가 대란, 주범은 누구인가
물가 대란 사태의 주범은 당연히 미친 공공요금 인상을 주도한 정부다. 다시 말해 물가 때문에 서민이 죽는 게 아니라 정부가 물가를 올려 서민을 죽이는 것이며, 그 수단은 공공요금 시장화 정책이다. 건전 재정에 깃든 사상은 공공 적자가 나기만 하면 공공요금을 올려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를 짓누르는 인플레이션 우려를 애써 외면하며 공공요금 인상에 열중하는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버스·택시·지하철 요금에 전기·난방·수도 요금까지 전방위적인 공공요금 인상이 민생 물가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이 순간에도 민생 곳간을 털어 나라 곳간을 지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정부는 지금의 고물가 충격은 전 세계 전반에 걸친 보편적 현상이라고 강변하곤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세계 경제는 유례없는 자산 버블 붕괴 위험과 고물가·고금리 충격에 노출되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민생 경제 역시 설령 재정을 확대해 지원한다 해도 이전의 균형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럴 때일수록 공공 물가부터 잡아 민생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있다. 필요하다면 재정을 풀어서라도 민생 경제가 직면한 물가 충격을 흡수해야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부의 물가 대응은 충격적이다. 물가 대책은커녕 무모한 공공요금 인상을 단행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다. 소비자 물가는 2022년에 6%대까지 치솟았으나, 통화 정책의 긴축 전환(금리 인상) 영향으로 올해 7월에는 2.3%까지 하락한 바 있다. 그러나 안정세로 접어들었던 소비자 물가는 올해 8월 3.4%, 9월 3.7%, 10월 3.8%로 재차 급등 추세로 전환했다. 정부는 고유가 등 대외 변수에 책임을 묻고 있지만, 지금의 물가 대란 사태는 공공요금 인상과 같은 내부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3%대의 소비자 물가도 높은 수준이지만 20%대를 유지하는 전기·가스·수도 물가에 견주면 하찮은 수준이다. 즉, 정부의 책임이 있는 전기·가스·수도 물가가 소비자 물가보다 5배 이상 높은 게 현실이다. 공공 분야의 미친 물가 상승이 민생 물가 전반에 걸쳐 상승 압력을 높이고 있는 이유다.
재정 풀면 물가 때문에 서민이 죽는가
질문에 대한 정답이다.
"먼저 공공요금 시장화 정책을 폐기하고, 재정을 풀어 제대로 된 물가 대책을 마련하면 서민이 산다."
정부가 공공요금 시장화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민생 대책도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공공 물가를 올리면서 물가 대책을 내놓은 것은 정책 간 충돌을 일으키는 부실 대책이기 때문이다. 먼저 문제의 원천을 제거하고 나서 재정을 풀어 물가 충격을 흡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부의 공공 물가 정책은 '민생 위에 이념'이라는 편향성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공공의 적자는 가격 전가를 통해 해소해야 한다는 시장주의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제는 물가 대란 사태와 같은 시장 실패가 현실화 되면, 그 충격이 중산층과 서민 전반으로 확산한다는 것이다.
공공 물가 시장화 정책의 본질은 '보편 충격-선별 지원' 조합이다. 즉, 공공요금을 올려 국민에게 재정 부담을 전가하고, 원성이 도를 넘어서면 극소수 취약 계층을 골라 지원하는 방식이다. 이 골병 드는 사이클이 무한 반복되는 사이 중산층이 서민이 되고, 서민이 취약 계층이 되는 것이다.
겨울의 길목에서 지난해 겪었던 난방비 대란 사태를 살펴보자. 정부가 논리도 맥락도 없이 난방비를 일거에 40% 이상 올렸다. 실질 소득이 급감해 소비 여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민생 경제가 난방비 폭탄을 맞은 것이다. 예상한 것처럼 정부는 100만여 가구의 취약 계층을 구제하겠다는 졸속 대책을 내놓았다. 난방비를 대책 없이 올려놓고 2000만 가구 중에서 100만여 가구만 구제하면, 나머지 1900만 가구는 그 충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이처럼 보편으로 충격을 가하는 공공 물가 정책은 설령 민생 경제가 정상화 되어도 신중하게 접근한다.
정부는 확장적 민생 재정으로 국정 운영 기조를 전환하고, 재정을 풀어 공공발 물가 대란이 불러온 소득 및 소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우선, 민생 경제가 정상 궤도에 진입할 때까지는 모든 공공요금 인상 계획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가 쏘아 올린 물가 상승분의 일정 부분을 소득 보전이나 소비 촉진을 통해 지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물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공공요금 정책 의사결정 구조 합리적인가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공공 물가 정책은 합리적이지 않다. 참여 주체이며 정책 수요자인 국민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정부의 이익이 주인의 이익에 우선하고,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cy problem)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다.
공공 물가가 일반 소비자 물가보다 낮게 관리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정반대로 가는 역주행을 경험할 정도로 냉혹하기만 하다. 일례로 전기·가스·수도 물가는 건전 재정에 힘입어 소비자 물가보다 5배 이상 높은데, 이 정도면 굳이 공공 기관이 존재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상식이 작동한다면 전기료와 난방비와 같은 공공 물가는 최대 인상 폭이 3~4% 수준의 소비자 물가보다 낮게 관리되어야 한다. 정부의 일방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공공 물가에서 공공성이 사라지는 대리인 문제를 초래한 결과다.
따라서 공공요금 정책은 반드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 수렴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공공 물가 정책의 참여 주체는 정부, 공공기관 그리고 국민이다. 정부는 공공기관의 부실 경영을 관리할 책임이 있고 필요시 재정 투입을 통해 공공기관 적자를 보전할 책임이 있다. 또한 공공기관은 자구노력을 통해 경영을 정상화할 책임이 있고, 정책 수요자인 국민은 주어진 책임의 범위 안에서 공공요금 인상을 수용할 책임이 있다.
문제는 책임이 있는 정부가 공공 적자에 대한 재정 지원 방안을 내놓지 않고, 모든 재정 부담을 가격 전가를 통해 국민에게 떠넘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법은 모든 참여 주체가 책임성에 기초해 공공요금 인상과 인하를 결정할 수 있는 '다자 공론화 기구'를 만드는 것이다.
건전 재정으로 무엇이 건전해졌나
'긴축'을 함축하는 건전 재정으로는 나라도 민생도 건전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무능한 재정 운영과 재정의 이념 편향성이 건전 재정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특히, 건전 재정 중독에 걸리면 경기가 좋을 때도 긴축이 중요하고, 경기가 나쁠 때도 긴축만 떠들게 된다. 곳간 관리인에게 재정 운영의 전문성 따위는 주변 변수에 불과하다. 국가 부채, 미래 세대, 약자 보호 등의 선동적 문구가 언론을 도배하는 사이 건전 재정은 민생 곳간을 털어 나라 곳간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최근 몇 년간 건전 재정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건전(긴축) 재정을 통한 민생 경기 부양"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법인세를 인하하되 건전 재정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것"도 터무니없다. 무능과 친기업 편향이 가져온 결과는 처참하기만 하다. 건전 재정으로 재정건전성은 더 악화되고, 민생 경제는 금리 충격과 물가 충격에 이어 이번에는 세수 부족까지 감내해야 할 판이다.
지난 2년간 역대급 초과 세수를 초래해 의도성 있는 과소 추계라는 의심을 받은 바 있는데, 올해에는 역대급 세수 부족을 기록할 전망이다. 59조 원의 세수 부족액 중에서 법인세 감소분이 무려 25.4조 원(전체의 43%)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반면, 근로소득세 감소분은 2조 원에 불과하다. 정부가 정책 수단에 불과한 건전재정을 국정 기조로 밀고 나간다면 결국 나라도 국민도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진짜 건전 재정은 관치(官治)에 뿌리내린 곳간지기 습성을 버리고, 경제 상황에 맞게 재정을 운영하는 전문 역량을 보이는 것이다. 지금처럼 경제 상황이 어려울 때는 확장 재정을 통해 민생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려내 다시 나라 곳간을 채우는 역량을 보여야 한다. 건전 재정 중독에 걸리면 재정을 풀면 물가 때문에 서민이 죽는 것으로 보인다. 진짜 건전 재정은 재정을 풀어 금리 충격, 물가 충격, 소득 충격을 막을 민생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국민대 특임교수이자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