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한국의 노래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한국은 알바 면접 볼 때 노래 듣고 뽑나' 감탄하곤 한다. 뭐하시는 분이냐 물으면 죄다 알바생이란다. 그만큼 가수 지망생들이 알바를 많이 뛰는 걸까? 꿈을 품고 열심히 오늘을 살아내는 그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피아노 맨'(Piano Man)도 그랬다. 고등학교도 자퇴하고 밴드 활동에 매달렸지만, 성공은커녕 활동을 이어가기도 벅찼다. 온 힘을 쏟아부은 1집 앨범도 엔지니어의 실수라는 악재까지 겹쳐 폭망했다. 자신이 어떤 위치까지 오를 수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 그는 낯선 동네의 바(Bar, 선술집) 한구석에서 피아노 알바로 일했다.
손님을 잘 다루는 웨이트리스가 있고, 결혼도 잊은 채 일중독에 빠진 폴, 해군 데이빗, 우울증에 걸린 듯한 술친구 존의 단골 술집이었다. 피아노 알바생은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그에게 연주를 청하는 노인이 마시던 진토닉도 잘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노래에 담았다. 영원한 '피아노 맨', 미국의 살아있는 팝 전설 빌리 조엘(Billy Joel) 이야기다.
'빌리 조엘 거리'가 생기다
두 주쯤 전에 지역 뉴스 앵커가 재미있는 멘트를 던졌다. 살아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를 가지게 되는 행운아가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으냐고. 빌리 조엘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라 한다. 이어서 전해진 '빌리 조엘 거리' 명명식 소식. 미리 알았으면 가봤을 텐데.
'피아노 맨'도 널리 사랑받지만 내게는 '어네스티(Honesty)'가 더 친숙하다. 여중 시절, 한 달에 한 곡 정도 팝송 가사로 영어를 가르쳐 주시던 영어선생님 덕이다. 가을 단풍이 한창이니 이참에 아이들과 함께 그 거리로 드라이브를 해야겠다.
그런데 '피아노 맨'을 휘파람으로 불러대는 큰아이와는 달리 막내가 시큰둥해 한다. 잘 모르는 할아버지 가수라고. 그래? 그렇다면 사춘기 소녀에게 잘 듣는 처방을 하나 해야겠지. BTS 뷔의 기사와 그를 인용한 빌리 조엘의 엑스(옛 트위터)를 보여줬다. 'Butter' 뮤직비디오가 빌리 조엘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빌리 조엘의 이름을 따라가는 가을 드라이브는 그렇게 기분 좋게 시작되었다.
빌리 조엘의 음악에는 뉴욕이 담뿍 담긴다. 비록 '피아노 맨'은 서부에서의 경험담에서 나오긴 했지만. 내가 사는 롱아일랜드는 그의 고향이자 지금도 그가 살고 있는 맨해튼 동쪽의 섬이다.
어린 시절 빌리 조엘의 관심은 클래식보다 비틀스 그리고 오토바이, 복싱 같은 과격한 운동이었다고 한다. 팝스타가 된 후로는 오토바이에 대한 그의 열정이 수집으로 이어졌다. 오토바이를 몰다 서너 차례 교통사고를 당했었는데, 두 손에 큰 수술을 받을 만큼 중상을 입은 적도 있다.
'빌리 조엘 거리'는 그가 수집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모은 작은 전시장(20th Century Cycles) 앞에 있다. '피아노 맨' 멜로디가 같이 새겨진 표지판을 사진에 담은 후, 전시장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와우. 입이 딱 벌어졌다.
개인 소장이라고 하기에는 클래식 자전거부터 종류별 오토바이와 근사한 자동차까지 볼거리가 꽤 많았다. 전부 실제 등록된 차량으로 운행이 가능하며 최근까지도 빌리 조엘이 오토바이를 타러 한 번씩 들른다고 한다. 잘 정비된 할리데이비슨, 트라이엄프, BMW, 혼다 명품 기종들이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있었다.
주말에만 전시장을 연다고 하니 때를 잘 맞춰 온 셈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볼거리에 큰아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자전거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태어난 해에 출시된 오토바이를 찾아 기념사진을 찍으며 한참을 구경했다.
첫 번째 앨범이름이 된 '콜드스프링 하버'
롱아일랜드는 제법 큰 섬이다. 섬 남쪽은 좌우로 끝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변이고, 북쪽 해안선은 요트나 보트를 타기 좋은 구불구불한 만(bay)이다. 백년 전쯤만 해도 맨해튼과 롱아일랜드 북쪽은 굴 천국이었다.
맨해튼 사람들도 바구니째 굴(Oyster)을 사고 팔며 양껏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도시 개발로 인해 바다가 오염되면서 맨해튼에서는 채굴이 중단되었다. 롱아일랜드는 아직도 맛 좋고 향이 진한 굴 생산지이다. 물론 이제는 비싸져서 굴 한 알씩 가격이 매겨지긴 하지만 말이다.
빌리 조엘의 고향은 오이스터 베이. 그러니까 그는 섬마을 굴밭에서 자랐다. 오이스터 베이 해변을 따라 가을이 물든 숲길을 끼고 달리다 보면 금세 크고 작은 보트들이 정박된 작은 공원이 나온다. 해변을 바라보고 선 뒤쪽은 나지막한 산이다. 콜드스프링하버(Cold Spring Harbor)라는 동네다.
맞다. 비록 발매 당시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지만, 빌리 조엘의 첫 번째 앨범명이었던 그 '콜드스프링 하버'다. 고요한 풍광이 기막힌 콜드스프링 파크는 '빌리 조엘 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산이 없는 롱아일랜드에서 그나마 좀 오를만한 등산로가 있고, 시설 좋은 도서관과 작고 조용한 해변 공원들, 올막졸막 오래된 예쁜 건물과 골목이 있어 우리 가족도 가끔 숨 쉬러 오는 동네다.
남다른 유소년기와 평탄치 않았던 초기 음악 활동을 힘겹게 이어가던 시절, 빌리 조엘도 그렇게 숨 쉬러 여기 왔을까? 처음 낸 앨범에 이곳의 이름을 붙인 걸 보면 남다른 애착이 있었지 싶다.
악동 빌리 조엘을 사랑하는 주민들
빌리 조엘만큼 '파란만장'이란 말이 어울리는 이가 있을까. 어린 시절 떠나버린 아버지, 굴곡진 음악 활동, 네 번의 결혼과 이혼, 성공만큼 따르지 않았던 재정 상황, 교통 사고와 재활... 에피소드가 끝이 없다.
그의 아버지는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던 유대계 피아니스트였다. 어머니는 오페라 단원이었다고 한다. 맨해튼에서 한적한 롱아일랜드로 이사했지만 아버지와의 연은 거기까지였다. 아내와 아들을 힉스빌(Hicksville)이라는 동네에 남겨놓고, 아버지는 유럽으로 돌아갔다.
운동을 몹시 좋아했던 십 대 소년 빌리는 비틀스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에 뛰어들었다. 좋아하는 음악 활동도 하고 돈벌이도 되자 학업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학교에서는 여러 번 기회를 주었다는데 빌리 조엘은 끝내 힉스빌 고등학교를 떠났다. 학교는 나중에 빌리 조엘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해 주며 선배로 남게 해주었다.
몇 년 전, 빌리 조엘은 폐교 위기에 처한 롱아일랜드 예술 고등학교를 전폭 지원해 주었다. 학교 음악 선생님과 함께 했던 활동이 좋은 기초가 되었다면서. 이미 교육국의 프로그램 폐지 권고가 내려진 상태였지만, 빌리 조엘이 무려 100만 불을 기부하고 신입생 유치에 힘쓴 끝에 롱아일랜드 예고(LIHSA)는 7년이 지난 지금도 운영중이다. 악동이라면 악동일 수도 있는 빌리 조엘을 지역민들이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미래의 '피아노맨들'인 오늘의 알바생들을 위하여
교회 가는 길, 교회 코너만 돌면 보이는 자그마한 예술 학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만치 보이는 이웃 고등학교. 빌리 조엘과 닿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서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대할 인연은 하나도 없다고.
지금 내게 햄버거를 건네주고 있거나 커피를 내려주는 알바생이 언젠가 또 다른 '피아노 맨'이 될는지 어찌 알까. 꼭 유명한 인물이 되지 않는다 해도 무언가 꿈을 가지고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이들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귀한 인물인 거다.
내일의 피아노맨을 사랑해 주는 것도 좋지만, 오늘의 알바생에게 '좋은 태도라는 응원'을 보내보면 어떨까. 알바생보다 친절한 고객. 직원보다 정중한 손님이 되어주면서 말이다. 훗날 그들의 노래속에 나도 모르게 관찰 당한 조금은 친절한 내가 담길지도 모를 일이니.
가을 드라이브를 잘 마치고 돌아온 이틀 뒤인 지난 7일, 모처럼 맨해튼에 나갔던 큰아이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타임스퀘어에 커다랗게 걸린 '피아노맨 50주년' 축하 전광판이라니(싱글 발매일은 11월 초, 앨범은 11월 9일).
빌리 조엘을 따라다녀본 가을길의 멋진 마무리인 듯싶다. '고단한 일상을 잠시 잊고 괜찮다는 기분이 들게 노래를 들려주는('피아노 맨' 가사 일부)' 영원한 피아노 맨.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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