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일본에서 한국을 찾아온 기무라(78)씨와 함께 전남 고흥 소록도를 방문했다. 나가사키에 사는 기무라씨는 영어교사 퇴직 후 한글을 배워 소설 <태백산맥>을 두 번이나 읽은 후 필자의 안내를 받아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을 방문했었다.
뿐만 아니다. 2007년에 태평양전쟁에서 숨진 아시아인들에게 사죄한다는 뜻으로 열린 '스톤워크 코리아'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제 반전 평화 순례행사단 일행은 '사죄와 우호, 평화를 위하여'라고 쓰여진 1톤 비석을 손수레에 싣고 부산에서 출발해 금강산까지 행진하며 반전과 평화를 외쳤다. 기무라씨는 행사 참여 뒤 원폭 피해자가 머무는 합천 '평화의 집'에서 두 달간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23년 10월 말 한국을 또다시 찾아왔다. 나가사키에 있는 강제 동원 피해자의 유골을 유족에게 봉환하기 위해서다. 강릉에서 유골 봉환 일정을 마친 그는 필자와 함께 소록도를 방문해 국립소록도병원일대와 한센병박물관을 돌아보았다.
기무라씨가 필자와 함께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한 이유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설립된 국립소록도병원의 초대 원장이 일본인 '아리까와' 원장이고,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20일까지 일본인 원장이 근무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원장 시절 일본인이면서도 환자들을 가족같이 아껴주고 헌신한 2대 '하나이' 원장도 있었지만, 환자에게 악질적으로 대한 4대 '수호' 원장도 일본인이었다. 그는 환자였던 이춘상씨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해, 이번 방문을 통해 그 진상을 더 알아보고도 싶었다.
"아! 부끄럽네요"... 일본인이 탄식한 이유
이춘상씨의 기념비석인 '이춘상 의거 기념비'를 돌아보던 기무라씨는, 당시 악랄했던 일본인 원장이 환자로부터 공격받았다는 설명을 읽고는 "아! 이곳에서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네요"라며 탄식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문제를 얘기할 때면 항상 "부끄럽다"고 말하곤 했다.
필자가 기무라씨와 함께 소록도를 돌아본 이유가 있다. 소록도에 관해 책을 쓸 예정인 필자는 기무라씨의 도움을 받아 내년 초에 동경에 있는 한센병 병원을 돌아볼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재일 한국인 환자도 있다고 들었다. 필자는 현재 일본 한센병 환자가 펴낸 책을 공부 중이다.
고흥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소록도는 일제강점기 시절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섬 전체를 병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입원 환자는 치료와 보살핌이 아니라, 강제격리 후 강제노역과 인권 침해를 겪으며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았다. 환자가 가장 많을 때 6200여 명까지 달했던 소록도에는 2023년 현재 600여 명이 살고 있다.
100년이 넘는 시간, 차별과 격리 폭력에 시달렸던 한센인들의 거주지 소록도는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언급을 꺼리는 터부 1번지였다. <소록도 80년사> 포함 소록도 한센인들의 구술록 5권을 다 읽은 필자는 이제 그분들이 말하는 고통과 가난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들이 겪었을 폭력과 차별 배제와 고립의 시간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내 아주 어린 시절인 1960년대에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마을마다 동냥하러 다니던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총 다섯 권 중 구술록 4권을 읽던 시기, 한센병으로 살았던 김외순(가명)씨가 고단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나는 지긋지긋하게 살아서 뼈가 뽀득뽀득 아파"라고 말한 대목을 읽으며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한많은 일생에 공감해서이기도 하지만 환자들의 진면목을 <오마이뉴스>에 활자로 차마 다 옮기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들을 다룬 소설을 준비 중이다.
이날, 소록도박물관 직원 조명래씨가 안내하는 대로 녹생리와 신생리 사이에 난 도로를 따라 나지막한 언덕길을 올라가니 소록도에서 생을 마친 환자들의 유골을 모신 만령당이 나왔다. 만령당에 모신 유골만 1만 1180위다. 만령당에 봉안된 유골 중에는 평양에서 출생했지만, 본적을 소록도로 기록한 분도 있었다.
조명래씨 말에 의하면 이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구술록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집안에 나병 환자가 생기면 이웃 주민들이 손가락질하며 다른 동네로 이사 가길 원했다'고 적혀 있다. 나병 환자를 본 적이 없다면, 코로나가 유행했을 때 공공장소에서 기침하는 사람만 있으면 모두가 피하던 때를 회상하면 비슷할 것이다.
만령당 다음 순서는 공회당에서 서생리로 넘어가는 꼬부랑길이다. 꼬부랑길 중간에는 '순바구길'이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에 따르면 박순암(순바구)은 홍안의 소년으로 병을 얻어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오랫동안 섬살이를 하며 소록도 내 크고 작은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여 소록도에는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순바구길 비문에는 '이 동산 모든 것이 하나같이 환자들의 손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록도는 어떤 토목건설 회사가 만들고 지켜온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려 입원한 수많은 환자들이 아픈 손발로 하나하나 만들어 이루어졌다.
'한센인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의 뜻
다음은 국립소록도병원한센병박물관에 기록된 한센병환자들의 생활상에 관한 내용이다.
수용된 환자들이 소록도에서 죽으면 한 집에 살던 사람들이 둘러앉아 찬송하고 난 후 시신을 본관으로 옮겨 의대생들이 해부실에서 해부했단다. 연구 대상이 되어 해부를 마친 시신은 화장터에서 가서 불태우니 '한센인은 세 번 죽는다'라고 했다. 발병해 죽고, 해부해서 죽고, 화장터에 가서 죽는다는 비유다.
1940년경, 소록도에 6천여 명의 환자가 입원했을 때 의사 2~4명에 간호사는 10명 내외가 전부였단다. 이런 환경에서 자가 치료는 생존의 문제였다. 환자들은 굳은살이나 화농 제거를 위해 무딘 칼날이 한 손에 들어오는 뭉툭한 크기의 치료용 칼을 제작했다.
당시 이들이 단체 생활을 하던 시절 배급받은 식량을 각자의 그릇(개우)에 담아 큰 솥에 함께 쪄내는 방식이 '개우밥'이다. 이렇게 하면 취향대로 밥을 먹을 수 있고 연료를 아낄 수 있으며 개인은 식량을 아껴 돈을 만들 수도 있었다. '개우밥'은 소록도의 아픈 역사와 합리적인 식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소록도에서 쓰이는 말 중에 '몰라 3년, 알아 3년, 썩어 3년'이라는 말이 있다. 한센병의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 치료 시기를 놓쳐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한센병 발병으로 소록도에 들어온 환자들은 모진 세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배움과 삶에 대한 열정, 자활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희망을 이어갔다.
죽음 앞에 선 한센인들이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연결해 준 것은 마을마다 있는 교회와 천주교 성당이다. 종교는 의지할 곳 없는 그들에게 한가닥 희망이었다. 한센인들은 아픈 와중에도 섬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자립하도록 열심히 가르쳤다. 녹산초등학교와 성실중고등성경학교가 그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사회에 나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립하기도 했다.
강제노역으로 만든 공원, 이젠 그 아래 피눈물이 보인다
병원 본관을 지나 동생리쪽으로 가면 '구라탑'이 세워진 중앙공원이 나온다. '현대의학은 능히 나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아름드리 나무와 예쁜 꽃들로 단장된 공원을 보면 천국에 온 것처럼 아름다운 공원이다.
1936년 착공하여 1940년 완공된 중앙공원은 당시 환자들의 강제노역으로 조성되었다. 외부에서 공수된 큰 바위들은 목도꾼들에 의해 옮겨졌고 각종 정원수가 식재되었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슬픔이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 몇 번 소록도를 방문했던 필자는, 실은 예전엔 오스카 와일드의 말에 공감했었다.
한센인들의 노력으로 이같이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졌으려니 하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자들이 말한 구술록을 다 읽은 지금은 다르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중앙공원의 아름다움에는 단순히 슬픔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문드러진 손에 붕대를 감은 손으로 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린 환자들의 피눈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