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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김지성의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매일 오전 11시, 습관처럼 청취해온 CBS 라디오 <신지혜의 영화음악>. 첫 오프닝 인사에서 오늘(10월 31일)이 마지막 방송이라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하던 일을 멈추고 입이 벌어질 만큼 적잖이 놀라버렸다. 덧붙여, 1998년부터 시작해 어느덧 25년을 진행해 왔다는 사실까지.  

엄마는 아침을 준비하러 부엌에 들어가실 때마다 제일 먼저 라디오를 켰다. 고정시켜 놓은 주파수를 저녁까지 듣다보니 자연스레 시간대별 DJ 이름도 외워졌다. 휴가로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내일은 돌아올까 오매불망 기다렸고, 감기로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오면 하루 속히 쾌유하길 바랬다.  

"마지막 방송" 목소리에 놀란 마음
 
  CBS 라디오 <신지혜의 영화음악> 모바일 화면 캡처
CBS 라디오 <신지혜의 영화음악> 모바일 화면 캡처 ⓒ CBS
 
그 중에서도 <신지혜의 영화음악>을 유독 좋아했던 이유는, 신지혜 아나운서의 매력적인 목소리 때문이었다. 노련하면서 담백했고, 도회적이면서 따스했다. 긴장을 풀어주듯 깊이 있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1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아쉬웠다. 음악들 사이로 스며드는 군더더기 없는 멘트는 명곡보다도 명품이었다.   

헤어질 결심 앞에서 두말없이 배웅해주고 싶었지만, 동경했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없다는 서운함에 사유가 궁금해졌다. 기획·연출·진행 등 1인 제작시스템으로 운영되어 왔기에 프로그램을 향한 애정과 부침이 태산과도 같을 텐데, 내려놓기가 어디 쉬웠겠는가.

별다른 동요없이 절반 이상의 선곡들이 흐른 뒤에야, 안정된 음색으로 하차 이유를 밝혔다. "퇴사하게 되었고, 이유는... 때가 되었다." 덤덤한 소회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의 질문이 구차할 정도로. 왜 오랜시간 팬이었는지 체감될 만큼의 깔끔하고 멋진 답변이었다.  

평소 라디오 DJ를 존경해온 이유는 묵묵한 일관성이다. 배우는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입듯 변화의 일상이 늘 공존한다. 매번 역할과 시대 상황에 따라 시간여행자처럼 떠나야 하기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해야 하는 것이 과제이다.  

반면에 라디오 DJ는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킨다. 아무리 업이라 해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컨디션으로 임한다는 것은 보통의 내공과 인내심으론 참아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을 일탈없이 붙잡아 둘 수 있었던 것은 청취자와의 소통 덕분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라디오를 왜 좋아해?" 평생 옆에 끼고 라디오를 들어오신 엄마에게 물어봤다. "예쁘게 말하는 법을 배워." 이어 TV 없이는 살아도 라디오는 있어야 된다 하셨다. 엄마는 외출하실 때도 라디오를 끄지 않는다. 집에 돌아왔을 때 음악과 함께 나지막히 반겨주는 사람소리가 온기처럼 훈훈하다. 라디오는 나이만큼 채워진 적막함을 덜어주는 고마운 벗이다.  

눈 뜨면 성장하듯 무수히 쏟아지는 미디어콘텐츠의 침공 아래 라디오의 위기를 잠시 걱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원한 딜레마인 고독이 사라지지 않는 한, 라디오는 존재할 것임을 깨닫고 근심을 접었다.   

25년보다, 더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슬프지만 그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다.
슬프지만 그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다. ⓒ elements.envato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고 원하는 음악도 들려주며 질문에 답해주는 비서형 AI가 생활 깊숙히 자리했지만, 라디오에 비할 수 있을까.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담겨 있고,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이 흘러넘치며, 공감과 위로를 주고 받는 라디오 안에는 진짜 사람이 있다.   

짧고 강렬하게 스치는 인연보다 적당히 느슨한 관계로 은은하게 머물러 주었기에, 인간과의 찐우정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라디오 같은 배우이자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마지막 엔딩곡을 남겨놓고 그녀가 클로징 멘트를 읽어 내려갔다.

"<은하철도999>에서 철이의 아쉬워 하는 모습을 보고 메텔은 이야기하죠. "철아, 나는 네 청춘의 어스름한 그림자...!" 어쩌면 저는 여러분들 청춘의 어스름한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가 도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하죠. "자, 이제 어디로 떠나볼까...!" 지금 제 마음이 딱 그런 것 같네요. 자, 도비는 free입니다! <해리포터 中 대사>"  

다이아나 로스와 라이오넬 리치의 <Endless Love> 킬링파트가 울려퍼지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단정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감동의 여운은 영화보다 진하고 향기로웠다. 그녀를 닮고 싶은 팬심에 나 역시 차분하게 작별을 고했다. 마지막 방송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마음속에 되새기며 살아도, 곁에 있으면 망각해버려 또 눈물의 고별식 앞에 서고 말았다. 슬프지만 그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다. 작은 욕심이라며 남긴 '그래도 영화음악은 신지혜가 최고였지'란 바람도 이루어 드리며.   

당신이 걸어왔던 25년보다, 더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신지혜의 영화음악>은 하루도 빠짐없이 최고였음을.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 나의 신디(지혜의 영화음악 제이).

CBS <신지혜의 영화음악>
첫방송 1998년 2월 2일~ 마지막 방송 2023년 10월 31일.      

덧붙이는 글 | 쿨하지 못할 것 같다. 그녀의 행보가 추적 가능한 SNS 세상이다. 우선 인스타 팔로우부터!


#신지혜의영화음악#신영음#신지혜#쿨하지못한애청자#좀만더질척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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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배우이며, 끄적끄적 글쓰는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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