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8시 30분. 서울 지하철 3호선 수서역에 정차한 오금행 1번 객차. 운전실(기관실)에서 기관사 한분이 내리고 다른 분이 올라탔다. 빈틈없는 기관사들의 교대근무 시간. 3호선은 오금역에서 대화역까지 장장 44개역을 운행한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임무교대를 하는 이들이 모습은 자못 숭고했다(우리 사회는 이런 장면 때문에 유지되고 존속한다).
매일 지하철을 이용하다보면 기관사분들의 노고와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평소에는 별 생각이 없다가도 응급환자가 발생하거나 조치상황이 필요할 때 그분들의 존재감은 두드러진다. 우리가 편안하게 출퇴근을 하고 안전에 대해 걱정이 없는 것은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이다. 지하철의 장점은 신속과 정확, 안전과 저비용이다.
서울과 수도권 교통 환경 중 최고는 '지하철'이다. 공식 용어는 '도시철도법'에 근거한 '도시철도'이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지하철이 더 친숙하다. 한국의 지하철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교통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고 편리하게 설계된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다. 수도권에서만 봐도, 서울시와 경기도를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1호선부터 9호선까지와 수인분당선과 경의중앙선 등의 도시철도까지 합하면 15개가 넘는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시민들의 발이 되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환경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파리는 유럽 여행자들에게 로망이지만, 지하철의 온갖 악취 때문에 파리지앵들도 자전거 출퇴근을 선호한다는 내용이었다. 파리의 예술적 향수에 낭만적 평가를 하는 이들도 파리의 지하철에 대해서는 고개를 휘젓는다고 한다. 그만큼 이용환경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최근 빈대와 전쟁 중인 파리 지하철이라는 문구가 새롭게 떠오른 걸 보면 우리처럼 쾌적한 환경은 아닌 게 분명하다.
지하철 광고에서 읽는 세상사
그 사회가 어떤가를 보기위해서 가야할 곳이 몇 군데 있다. 첫째는 시장이고 두 번째는 대중교통이며, 세 번째는 공공기관이다. 이런 장소들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그 사회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증명한다. 세 곳 모두 시민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접촉돼있다.
서울의 지하철은 하루 평균 700만 명 이상이 이용한다. 출퇴근 시간에 '지옥철'이라는 오명도 있지만, 수많은 시민들을 실어 나르며 서울과 수도권 지역 경제활동의 동맥 역할을 한다. 대규모 유동인구 덕분에 지하철의 하루 이용데이터는 마케팅 전략수립을 위한 관계자들에게 상업적 영감을 제공한다. 광고와 홍보의 창구이자 요람.
TV나 각종 대중언론매체는 주로 대기업이나 소비자 계층이 광범위한 상품 광고가 주류를 이룬다. 반면 지하철이나 버스 택시 등 대중교통의 광고판은 중소기업이나 의료나 교육 분야 등 소비 계층이 다수이긴 하나 특수한 분야를 홍보하는 데 널리 쓰인다.
수십 년째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른 광고물의 변화가 눈에 띤다. 각종 광고는 그 시절의 경제상황과 주요 트렌드를 상징한다. 물론 끊임없이 지속되는 광고도 있다. 화장품이나 의류, 아파트 등 주택과 상가분양, 각종 가전제품에 관한 것이다. 주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물건들과 사물들이다.
2010년대 초반. 지하철 내외부에 갑자기 눈에 띄는 광고가 등장했다.
"개인회생파산 단돈 50만 원에 책임 면책 보장"(지금은 이렇게 광고하지는 않는다.)
다소 자극적인 문구로 서초동과 교대 인근의 사무실 전화번호가 기재된 광고판이 지하철 객실에 많았다. 아마도 대내외적 경제적 상황의 악화로 한계상황에 처한 이들이 늘어난 까닭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서민의 삶이 행복의 세계로 진입한 시절이 있었을까?)
그 다음은 성형외과와 피부과 등의 각종 병원 광고,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광고, 주택분양광고와 보험, 그밖에 각종 전문가들의 광고가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돌고 돌아 광고판을 장식했다. 물론 지하철 노선에 따라 서로 다른 광고물이 걸린걸 보면 이용객의 수요를 예측하는 맞춤형 시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교육 관련 정보가 압도적이다. 각종 시험과 전문자격증에 대한 광고와 수능과 입시학원 광고가 많이 눈에 띤다. 저마다 합격률 1등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수많은 잠재적 수험생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만큼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조기퇴직자가 많아지면서 각종 자격증에 쏠린 눈길이 연령대에 관계없이 증가하고 있다.
다양한 수요가 공급을 부르고, 욕구 충족을 부추기는 공급은 다시 수요를 창출한다. 돌고 돌아가는 세상의 만화경을 보면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짐을 알 수 있다. 시장이 협소하고 수요자가 적은 경우에 광고는 크게 의미 없다. 최근 이혼과 회생파산, 노후준비와 자격증시험 관련 광고가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시장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 광고시장은 우리의 고통과 맞닿아 있다.
다시 증가하는 회생파산 등의 법률시장 광고
세상은 점점 힘없는 이들이 살기 힘든 구조로 설계되고 있다. 정보는 국가와 강자들에게 집중되고 약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더 취약한 존재가 된다. 국가는 시민을 지배하기 위해, 기업은 자신들의 상품을 위해 공포(Fear), 불확실성(Uncercainty), 의심(Doubt)을 중요한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한다. 퍼드(FUD)는 이들의 합성어로 다양한 상황에서 전전긍긍한 상태를 말한다. 주로 급변하는 시장상황, 주식이나 가상화폐, 가짜뉴스 등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로또 광고가 많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로또를 구입할까? 반짝 효과는 있겠지만, 일시적일뿐 계속 일정한 수 이내의 구입자들이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로또는 FUD와 관계없는 희박한 확률의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회생파산 신청이나 이혼신청, 병원홍보가 늘어나는 것은 우리사회의 어딘가가 아프다는 신호일수 있겠다. 욕망의 과잉과 욕구충족의 실패는 늘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있다.
이런 광고를 보면서 '비용은 어떻게 하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경제적 한계에 이른 이들이 회생파산 신청비용 200여 만 원 이상을 일시에 마련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눈에 보이는 비용보다 보이지 않는 비용도 있을 터인데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자칫하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빚을 져야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는 법률대리인 측에서 편법으로 소송(신청)비용 마련을 알선하거나 중개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송비용을 낼 여력이 없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소송구조 제도가 있다. 소송구조는 소송비용을 지출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 대하여 법원이 당사자의 신청이나 직권으로 재판에 필요한 비용의 납입을 유예 또는 면제시킴으로써 그 비용을 납부하지 않고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소송구조의 대상은 민사 행정 가사 본안소송은 물론 독촉사건과 가압류가처분 신청사건도 대상이 된다. 당연히 개인회생파산 신청사건도 포함된다. 소송구조를 받는 비용은 일반적으로는 인지대, 변호사 보수, 송달료, 증인여비 감정료 등 기타 재판비용이다. 다만, 개인회생파산 사건은 변호사 비용과 송달료에 한한다. 공고료, 인지 등 절차비용은 본인이 부담하여야 한다.
회생파산절차에서 소송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일반적인 소송구조는 신청인의 무자력과 승소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무자력은 통상 재산관계진술서를 통해 판단하며, 승소가능성은 패소할 것이 분명하기 아니할 경우 인정되며, 법원이 재판절차에서 나온 자료로 판단한다.
개인회생파산 신청사건에서는 일반적인 소송구조의 요건과는 달리 승소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소송구조 대상자를 특정한다. 주로 기초생활수급자, 한부모가족, 60세 이상, 장애인 등이 대상이 된다. 대상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개별 법령에 따라 자신이 소송구조 대상자임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제출하여야 한다.
소송구조 대상자 지정 절차를 이용하여 변호사가 지정되면, 그 변호사는 소송구조 신청뿐만 아니라 개인회생파산 신청, 절차 종료 시까지 계속하여 소송구조 대상자를 지원하게 된다. 소송구조제도는 비용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한계채무자들을 보다 신속하게 개인회생 파산 면책을 신청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법서비스의 접근성을 향상시킨다.
대법원은 '소송구조제도의 운영에 관한 예규'를 개정하여 이용가능 채무자 범위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기준중위소득 60% 이하에서 75% 이하로 확대하는 내용으로 예규를 개정했다. 이는 경제적 위기에 처한 채무자가 적시에 회생파산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그동안 예산부족으로 이용률이 저조해 소송구조제도가 실효성이 낮다고 비판을 받아왔다. 향후 안정적인 예산확보의 노력과 이용자 범위확대는 한계채무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022. 11.부터는 신용회복위원회 경유사건 중 일정사건에 대해서는 신용상담보고서를 참조하여 파산관재인 선임 없이 파산선고와 동시에 폐지 및 면책하는 '신속면책절차'를 실시하고 있다. 그 대상은 취약계층으로서 보유재산이 거의 없는 기초생활수급자, 70세 이상의 고령자, 중증장애인 등이다. 이 제도는 취약채무자들은 파산관재인 예납비용을 납부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 파산관재인 선임 없이도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직은 우리 법 시스템 하에서 더 따뜻해질 수 있는 여지(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행이다. 더 낮은 곳에서 더 약한 이들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지하철 운행만큼이나 숭고한 작업이다.
희희낙락으로 살아 움직이는 지하철이 되기를 바라면서
어느 정치인은 지하철을 탈줄 모르고, 어떤 정치인은 선거 때에만 지하철에 오른다. 우리의 메마른 정치와 공감능력 부족한 정치인들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2호선을 타고 잠실에서 교대역으로 이동할 때면 고 노회찬 의원이 용접했다던 H빔이 떠오른다(H빔은 건물이나 구조물의 뼈대를 위한 거대한 강철기둥이다).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당연지사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희희낙락(喜喜樂樂)을 꿈꾼다. 분노하고 갈등하며 슬픈 상황이 생략된 일상 공감의 시공간. 다소 번잡해 보이지만 하루의 시작과 끝이 있는 화수분의 공간. 바로 지하철이 아닐까. 성실한 누군가들의 땀과 열정이 수많은 H빔으로 시민의 발과 안전을 떠받치고 있다.
지하철에 타기 전부터 책을 꺼내든다. 30분 정도를 이동하는 지하공간의 시간. 몇 페이지를 읽어내지는 못하지만 몰입감은 단연 으뜸이다. 적당한 흔들림과 백색소음,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도 나만의 리추얼을 행하고 있다는 만족감은 역시나 엄지 척이다. 책과 사람들을 보고 읽고 생각하며, 메모하고 고민하는 자투리 시간은 지하철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다. 나만의 의식에 집중한 나머지 때때로 내려야 할 역을 몇 개 지나치기도 한다.
퇴근 시간의 지하철, 객차 중간에 위치한 임산부석. 초기 임산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노트북을 사용 중이다. 가만히 보니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하는지 검은 화면에 파랗고 노란 숫자와 글씨가 빠르게 새겨진다.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을까... 궁금함이 피어올랐다. 저 손끝에서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해줄 무언가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 어느 노선의 지하철을 타더라도 외국인들이 눈에 많이 띤다. 무슨 얘긴지는 몰라도 웃으며 편하게 대화하는 그들을 보노라면, 우리 지하철 이용환경이 불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지하철이 시민들의 발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법과 제도도 어려움에 처한 시민들의 손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따뜻한 심장과 섬세한 손길로 시민들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H빔을 만드는 정치를 보고픈 바람 또한 크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서울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