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균 노동자. 그가 떠나고 다섯 해가 지났다. 그는 2018년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혼자 떨어진 석탄을 치우는 작업을 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
지난 11월 24일,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5주기 '유감'(regret) 추모 전시가 시작됐다. 전시 첫날에 맞춰, 문래동 대안예술공간 '이포'에 다녀왔다. 문래역 7번 출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익숙한 도심 속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낯선 철공소가 줄지어 서 있는 거리가 나타났다. 철근 쇠붙이들이 서로 부딪치고, 깎이는 소리가 났다.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지금 김용균을 만나러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2층 전시장에서 김미숙 어머니를 만나 인사를 드렸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듯했다. 아마 요즘도 많은 곳을 바삐 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계시느라 그런 것이리라.
어머니를 처음 뵌 건 다른 산재 피해자 추모 분향소 텐트 안에서였다. 어머니는 아들과 나이가 같은 또 다른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계셨다. DL이앤씨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한 고 강보경 노동자는 94년생으로, 김용균 노동자와 출생년도가 같았다.
텐트의 작은 불빛에 의지해 처음으로 마주본 어머니 눈빛은 맑은 갈색이었다. 투명하면서도 깊은 눈. 그 눈으로 나를 다정히 봐주셨다. 그리곤 전시회에 꼭 오라고 초대해 주셨다. 김용균의 눈동자는 무슨 색이었을까. 어머니를 닮아 깊은 갈색이었을까? 물건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까.
컵라면과 자격증, 그리고 절대반지
작업복, 이름 석 자가 올곧게 적힌 슬리퍼, 컵라면 세 개와 과자 하나, 온몸을 뒤덮은 석탄재와 먼지를 씻길 세면도구들, 손목시계, 이어폰, 발포형 비타민, 손톱깎이, 연필 한 자루 등등... 김용균 노동자의 유품들이다. 일하면서 꼭 필요한 물건들뿐이었다. 단출했다.
이날 이경화 건강보험공단 경인지 회장은 김용균 노동자의 소지품 중에 컵라면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콜센터 노동자들의 책상에도 늘 컵라면이 두세 개씩 놓여 있다고 한다. 밀려오는 콜을 모두 받으려면 빠르게 식사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계를 한시도 멈추지 않는 발전소에서 김용균 노동자도 컵라면과 과자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전기산업기사, 전기기능사 자격증... 스물넷의 김용균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김용균 노동자는 생전에 자신의 메모장에 "너무 생각없이 앞을 쫓지 말자" "뭐든 확실히 해놓자"고 적어두었다. 스스로 적은 문장들로 매일 절제하며, 자신의 목표를 가다듬고 미래로 나아가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동심적인 면모가 있었다.
김용균은 유명 판타지 작품 <반지의 제왕>을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작품 속 절대반지를 늘 갖고 싶어 했다. 택배로 주문한 절대반지는 그가 떠난 후에야 도착했다. 김용균이 하루만 더 살았다면, 그 반지를 끼워볼 수 있었을 거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김용균이 살아서 그 반지를 보았다면, 정말로 기뻐했을 것 같다. 김용균은 어떤 이유로 반지의 제왕을 좋아했을까. 이제는 그 이유를 물어볼 수가 없다.
당신의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있나요
이번 전시에는 노동자들의 작업복과 물건들이 전시됐다. 종일 고온다습한 환경에 노출된 급식노동자들을 안전으로부터 지켜줄 수 없는 고무장화와 위생복, 산불진화 노동자들을 화마로부터 보호하지만 무겁고 불편한 방화복, 화장실 가는 걸 참아야 할 정도로 입고 벗기 불편한 조선소 노동자의 작업복, 마트 노동자가 한 번에 스무 개가 넘도록 끌던 카트, 졸음을 참아야만 하는 택배 노동자의 캔 커피.
메이크업 브러쉬들이 한쪽 벽에 걸려 있었다. 브러쉬가 노동자에게 어떤 고통을 줄까? 의아했다. 뜻밖의 답이었다. 면세점 판매노동자들은 종일 온갖 브러쉬들을 허리에 걸고 근무한다.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브러쉬들이 꽤 무거워 허리가 아프다고 한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이었다.
그리고 이런 안전 보호물품조차 받을 수 없는 건설노동자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옥상에서 만날 수 있었다. 왜 옥상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건설업 산재에서 추락사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안전모, 안전화, 안전벨트를 모두 착용해도 백 퍼센트 안전할 수 없다는데, 안전 보호물품 없이 일하는 건 얼마나 위험할까.
더 이상의 '유감'은 받지 않겠다
전시장 콘크리트 벽에는 상처를 주는 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왜 죽었는지 우리도 궁금하다' '입 멀쩡하면 출근해라' '안 해도 될 업무를 하다가 죽은 거다' '재수없게 여기서 죽어, 돈 줄게' 실제로 산재를 당한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으레 듣는 말들이라고 한다.
이번 5주기 추모 전시회 제목은 '유감'(regret)이다. '유감스럽다' 우리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 '죄송하다'고 하지 '유감스럽다'고 하지 않는다. 많은 사업주가 책임을 면피하려고 '유감'이라고 말한다. 이런 유감이 늘어날수록 죽음은 더욱 막기가 힘들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의 '유감'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김용균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일어난 산재 사고들이 벽 한 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락된 사건들이 있었다. 일하다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전부 담길 수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산재사고의 타임라인이 그려진 벽이 있었다. 관람객들은 자기가 기억하는 사고들을 빈 곳에 적어 넣었다. 나도 함께 적었다. 항상 쓰던 만년필이 오늘따라 잘 나오지 않았다. 이들의 추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나보다.
아무도 모르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름이 내 눈앞에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적을 수 없었다. 이 공간은 우리에겐 너무 작았다. 그동안 일하며 죽어간 노동자 전체를 기록할 수 있는 전시관은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누락하고 있다.
한편 이번 <김용균을 기억하는 다섯 번째 겨울 특별 전시, 유감> 전시회는 12월 3일 까지 진행된다. 평일 11시부터 20시까지, 일요일은 17시까지 열린다. 전시는 죽음의 행렬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김용균, 김용군들의 죽음', 진짜 책임자, 사업주들의 못된 말을 통해 일터의 생명안전 현실을 짚어보는 '남겨진 이들의 고통', 작업복과 공간, 도구 등을 통해 서로의 안녕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살아갈 이들의 노동은'으로 구성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향진 기자의 블로그 <이향진 기자의 산재 로그온>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