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하는 친구의 선창에 따라 송별회에 참석한 친구들이 잔을 높이 들었다. "친구 영길이의 건강을 위하여." 친구들은 마치 오늘 밤이 지나면 세상이 끝이 날 것처럼 연이어 막걸릿잔을 비웠다. 그렇게 영길이의 군 송별연이 끝난 지 두 달 후에 장승길(1949년생)은 안동역에서 중앙선에 몸을 실었다. 1년 전 개교한 육군3사관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다.
대구에서의 시험은 무난히 치렀다. 다행히도 그가 공부한 영역에서 대부분의 문제가 출제됐기에 합격을 자신했다.
청년 장승길은 영천의 국군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졸업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졸업식 마지막 순서로 '교장님께 대하여 경례'하는 소리에 '충성'하는 경례를 붙였다.
'와하하'하는 웃음소리가 열차 안에 가득했다. 눈을 비비고 주변을 멀뚱히 바라보는 승길은 잠시 후에 '졸업식'이 꿈인 것을 알아챘다. 얼굴이 빨개진 그는 머리를 들 수 없었지만, 잠시 후면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뜨거운 심장이 싸늘해지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합격자 발표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합격'이라니.
가슴을 커다란 돌멩이가 누르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답답했다. 때는 육군3사관학교가 개교한 다음 해인 1969년도였다.
청년 장승길이 자신이 육군3사관학교에 불합격 된 것이 실력이 아닌 '유령'의 힘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사촌 형 장승경도 서울고등법원 행정직 시험에 낙방했다. 평소 수재 소리를 듣던 장승경이 시험에서 낙방한 것은 신원조회 때문이었다. 장승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장승경과 장승길이 이른비 '연좌제'(신원조회)로 좌절을 겪은 이유는 6.25 때 행방불명된 장승익(1929년생)의 존재에 있다
. 장승익이 1950년 가을 행방불명돼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슴을 졸이던 가족들에게 정부는 장승익의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사돈에 팔촌까지 감시하며 그들의 삶을 옥죄었다.
특히 장승익의 집에는 불청객인 안동경찰서 경찰들이 수시로 들이닥쳤다. 구두를 신은 채 안방에 침입한 경찰은 "장승익이 집에 온 적 있지"라며 행패를 부렸다. 그것도 수차례에 걸쳐서 말이다. 연례행사처럼 행해진 경찰들의
수색은장승익의 동생 장승기(1931년생)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장승익이 한국전쟁 때 어떤 반정부 활동을 했기에 수십 년간 그의 가족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신원조회라는 불이익을 받았을까.
대체 그는 왜 사라져야 했을까
"삼촌, 어디로 가는 걸까요?"
"낸들 알겠냐."
인민군에게 붙들려 가는 일행은 안동군 월곡면(현 예안면) 도목동 장승익과 그의 삼촌 장인진
(1929년생)을 포함한 월곡면 청·장년 수십 명이었다. 다리에 종기가 난 승익은 대열에서 자꾸 뒤졌다. 인민군이 총구를 들이대고 "동무래, 빨리 걸으라우"라며 재촉했지만, 조금 가다 보면 승익은 자연스레 대열에서 수십 미터 뒤로 처졌다. 조카와 나이가 같은 장인진은 승익을 부축한다는 명분으로 대열의 맨 뒤에서 걸었다.
봉화방향으로 한정 없이 걷는 대열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하현달이 유일했다. UN군의 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 말 북한노동당은 일시적(?) 후퇴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인민군과 지방좌익은 인공시절 그들의 통치행위에 협력한 인민위원회와 여성동맹, 민청원들을 후퇴대열에 합류시켰다. 지역과 마을에 남아 있다가는 부역죄로 처벌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한편 인민군과 지방좌익은 우익들을 각 지역 경찰서 유치장이나 형무소에 구금시켜 놓았다가 집단학살한 뒤 후퇴하기도 했다. 전주, 대전, 청주에서 참극이 벌어져 경찰 가족과 우익인사가 수백 명에서 천오백여 명 가까이 죽임을 당했다. 다행히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소규모(?) 우익인사의 강제 연행과 학살이 지역 곳곳에서 벌어졌다.
장승익 대열이 산모퉁이를 지날 때 장인진은 죽기 살기로 뜀박질을 했다. "저놈 잡아라"라는 소리에 졸면서 행군하던 인민군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장인진은 언덕에서 구르면서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장인진이 인민군으로부터 경상을 입고 귀가한 반면 장승익은 다리가 불편해 도망칠 수 없었다.
이후 장승익 대열이 학살됐다는 소문은 횡했했지만 정확한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가족들은 장승익이 '언제나 돌아올까'라는 마음으로 가슴을 졸였지만 끝내 소식이 없었다. 답답하던 차에 무속인을 찾아갔더니 "북극성(북쪽)을 따라가다가 별똥별이 됐구만"이라는 답을 들었다. 죽었다는 소리였다. 십여 년을 기다리던 끝에 가족들은 사망신고를 했고, 안동장씨 족보에는 '동란 중 불귀(不歸)'라고 명기했다.
경북 안동군 월곡면 도곡리 대한청년단장 권오성(1913년생)은 1949년 8월 18일 지방좌익과 빨치산에게 자택에서 죽임을 당했다. 평소 대한청년단 활동으로 좌익의 미움을 산 권오성은 사건 당일 새벽 3시 빨치산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방 밖으로 나왔다가 지방좌익과 빨치산 10여 명에게 삽 등으로 구타를 당했다. 친척과 마을주민들이 권오성을 안동병원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낙동강의 물이 불어 배를 띄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만에 권오성의 이웃 마을인 월곡면 도목리에서 장승익이 강제 연행돼 죽음의 골짜기로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전쟁 전 경북의 산악지역에서는 빨치산과 경찰·군의 공방전이 지속됐다. 산악지대에서는 말 그대로 '낮에는 대한민국 세상, 밤에는 인민공화국 세상'이었던 것이다.
당시 지방좌익과 빨치산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 미군정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싸움을 전개했다. 또한 이들은 수영산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밤마다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는 등 주민들에게 피해를 줬다.
장승익 사건 발발 한 달 전에는 의용군 강제 모집에 의한 피해자들이 있었다. 안동군 와룡면 산하리 김영섭(1929년생)은 1950년 8월경 인민군과 내무서원 등에 의해 의용군으로 징집됐다. 김영섭은 마을 청년 2명과 함께 대구로 연행돼 팔공산 전투에 참여했다.
인민군 퇴각 시 도주해 마을로 돌아온 청년 2명은 김영섭이 "다부동 전투에서 인민군들이 굴속으로 도망치자 국군이 기관총을 가지고 굴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집중사격 했는데 김영섭이 그때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진실화해위원회, 경북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2009년 하반기 보고서)
이런 정황을 참고한다 하더라도 장승익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 끌려가 삶과 죽음의 운명이 귀착됐는지를 판가름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인민군 혹은 빨치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 봉화 방향으로 끌려가다가 집단학살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에는 의용군 모집이란 불가능했으며, 장승익과 장인진이 어떤 우익활동을 했는지는 추후 밝혀야 할 과제다.
'반공가족'도 감시... 관찰보호자 카드는 무엇을 노렸나
장승익이 인민군 혹은 지방좌익에게 강제 연행돼 학살된 것이 확실하다면, 그의 가족은 반공(反共) 가족일 수밖에 없는데, 경찰은 왜 이들을 감시했을까. 보도연맹 사건, 형무소 사건, 부역혐의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에게 수십 년간 연좌제를 적용한 것은 극우반공 체제에서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빨갱이 하면 이가 갈리는(?) 반공 가족을 왜 감시했을까. 이 의문점에 대한 답은 당시 전국경찰서에서 작성된 '관찰보호자 카드'에 있다.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이민수(가명, 1914년생)는 대전신학교 1년을 수료하고 예수교장로회 교단에서 전도사로 14년을 시무한 종교인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의용군 모집에 의해 끌려갔다가 전쟁터에서 UN군의 포로가 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그는 휴전협정을 앞두고 친공과 반공의 선택의 기로에 섰다. 고향이 충북 영동이었던 그가 반공 진영을 선택한 것은 당연했다. 주소지를 떠나 절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로 석방된 그는 고향 영동으로 오면서 중간에 수차례의 반공포로 환영 대회에 참가했다.
영동군 매곡면에 와서도 반공인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영동경찰서는 이때부터 그를 수십 년간을 관찰보호 대상자로 선정해 감시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 번 빨갱이는 영원히 빨갱이 이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이민수는 감시당할 당시인 1970년대에 목사였고, 마음 한 켠에 사회주의라는 신념을 지닐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가 그를 감시한 건 이민수의 사상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반공체제로 묶어 세우기 위해서였다.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피해자 장승익의 친인척도 마찬가지다. 장승익이 당시 어딘가에 살아 있을 가능성도 없었고, 간첩으로 내려올 가능성도 없었는데, 그의 가족을 감시한 것은 대한민국을 반공사회로 만드는 데 하나의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희생양이 된 장승익 친인척은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장승길의 아버지 장점진은 6.25 때 보국대로 참전했다가 철원에서 북한군의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눈 위와 손등에 파편이 박힌 그는 후방으로 후송돼 병원 생활을 했다. 상처가 완전히 치유된 뒤 이번에는 정식 입대 영장이 나왔다. 제주도 신병훈련소에 입대한 그는 만 4년여의 군 복무를 했다. 보국대 경력이 군복무 기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상을 입은 사실이 누락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했고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아들 장승길이 신원조회로 인해 육군3사관학교에 낙방하는 불이익만을 당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직업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장승길 가족과 한국전쟁기 반공포로 가족에게는 한낱 꿈같은 얘기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