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욕이 많지 않은 편이다. 뭐 하나를 사려면 꼭 필요한 것인지 며칠을 두고 생각한 다음, 그래도 처음의 구매의사가 바뀌지 않을 때 비로소 물건을 구입한다. 미니멀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가급적 단출한 규모로 살림을 꾸려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이 연말만 되면 허사로 돌아간다.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마음에도 스멀스멀 추위가 찾아들어 괜히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이것저것 살펴보다 눈앞에 떠 있는 맞춤형(?) 광고를 외면하지 못하고 클릭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음의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구경만 하려던 것이 결국 구매로 이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번에는 연말 특수로 매출 부진을 만회해 보려는 기업들이 블랙프라이데이니 쓱데이니 하는 이름을 내걸고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진행하기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이것저것 결제를 하고 말았다.
첫 시작은 패딩이었다. 분명 옷장에는 몇 벌의 겨울옷이 걸려 있지만 입으려니 손이 안 가는 것들이라 적당한 가격의 아우터를 한 벌 장만하려고 쇼핑사이트를 둘러보고 있었다.
상세 사이즈와 상품평을 보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 결제하려던 순간, 익숙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엄마였다. 추운 날씨에 따스하게 입으실 만한 겉옷을 한 벌 사고 뒤이어 시어머님을 위한 것도 구입했다. 옷 한 벌만 사려던 처음의 계획은 그렇게 양가 어머님들의 패딩 결제로, 다시 조카들 네 명의 크리스마스 선물 구입으로 이어졌다.
남편이라도 말려주면 좋으련만
한 번 불 붙은 쇼핑 욕구는 사그라들 줄 몰라서,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울리는 접시 몇 개를 사고 코코아 타 먹기 좋게 생겼다는 이유로 커플 머그컵도 구입했다. 남편이라도 말려주면 좋으련만 그 역시 커플 전기자전거에 메타퀘스트 3(입문형 VR기기)를 질렀다. 부부는 겨울 타는 것도 닮아가는 모양이다.
그렇게 쌍으로 지름신이 내린 우리에게 얼마 전 벌어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남편이 O마트에서 2만 원 이상 구매 시 1만 원 할인 쿠폰을 받았다며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물었다. 바로 전날 일주일치 식재료를 다른 곳에서 구입한 터라 딱히 필요한 게 없었지만 이런 할인 쿠폰은 꼭 써야 하는 남편의 성미를 아는지라 만두를 여분으로 사둘까 싶어 김치만두와 과자를 주문해 달라 부탁했다.
평소 즐겨 먹는 P사의 김치만두 두 봉과 스낵 한 봉을 담으니 2만 원이 채워졌다. 물품 품절 시 대체 상품 배송을 원하는지 묻는 질문에 별생각 없이 '아니요'로 선택하고(그동안 만두가 품절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다른 제품은 입맛에 맞지 않았기에) 결제를 마친 후 잊고 있었는데 다음날 폰으로 문자가 날아들었다. 우리가 주문한 김치만두가 품절되어 스낵만 배송된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순전히 1만 원 할인을 받기 위해 필요하지도 않은 걸 구입했는데 결국 과자 한 봉지만 집으로 배송된다니. 왜 일부 품목 품절 시에 전체 결제금액 취소 같은 옵션은 없는 건지.
과자 비용 1,184원에 배송비 3,000원이 붙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었다. 배송완료 문자를 받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감자 스낵 한 봉이 덜렁 담긴 커다란 쇼핑백이 놓여 있는 걸 보고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평소 지름과는 거리가 먼 우리 부부가 유독 겨울에만 이렇게 구매욕구가 상승하는 건... 아마도 날씨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겨울은 해가 짧아 다른 계절에 비해 햇빛 노출이 적어지면서 비타민D 합성이 줄고 기분과 식욕, 수면을 조절하는 세로토닌과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멜라토닌 분비가 저하돼 우울해질 수 있다고 한다.
자연은 그대로, 변한 건 내 시선이었구나
이런 계절성 우울증에 더해 노화를 몸으로 체감하는 시기가 되면서 겨울은 점점 더 반갑지 않은 계절이 되어가고 있다. 해가 짧아지고 추위가 옷깃을 파고드는 철엔 몸 이곳저곳이 삐그덕 대는 데다 보이는 풍경은 칙칙한 잿빛 아니면 고동색이니 반가울 리가 없다.
생명의 기운이 꺼져버린 듯한 자연을 보고 있으면 인생의 말년을 미리 당겨 겪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이런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뭔가를 계속 사들이는 것이겠지.
몇 주 전 떠나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블로그에 썼던 일기의 한 부분을 옮겨본다.
'다가올 계절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시구처럼, 요모조모 뜯어보면 괜찮은 구석이 있겠지.'
예전엔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겨울이 좋았다. 얼굴이 얼얼해질 정도의 추위 속에 하얗게 입김을 내뿜으며 걷는 사람들은 그대로 액자 속에 담겨도 좋을 풍경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차츰 생각이 바뀌었다. 헐벗은 채 앙상한 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이 생의 마지막을 견디는 것 같았달까. 하지만 나와는 달리 나무가 가장 근사해지는 계절이 겨울이고 꽃 중에 나무에 핀 눈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지인도 있다. 혹한을 견디는 나무가 어떤 이에게는 순백의 배경에 놓인 멋진 오브제 같아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모든 것은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잊고 있었던 진리가 다시금 마음속에 살아났다.
사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시계를 돌리고 있을 뿐인데 '상실'이라는 필터를 씌우고 보니 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자연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에 해당되리라. 그래, 이번 겨울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이런저런 생각들은 걷어내고 그저 거기 있는 그대로.
주관적 필터를 걷어내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커진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아름답다.
우리 삶도 그러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브런치스토리와 블로그에도 함께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