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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이 달리다가 멈춰서고, 문이 열린 후 닫히고, 다시 출발한다. 승객으로선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 과정. 그러나 승무원들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사뭇 다르다. 열차는 정차해야 할 위치가 정확히 정해져 있다. 이 위치에서 앞뒤로 40cm 오차 범위 내에 열차를 세우지 못하면 문이 제대로 열리지도 않는다. 열차가 정위치에 서면, 열차의 출입문을 열어야 한다. 이후 조작반으로 스크린도어(PSD)가 열리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제 CCTV를 살펴볼 차례. 승객들이 안전하게 타고 내리면 다시 출입문과 스크린도어를 닫아야 한다. 혹시 승객이나 장애물이 끼어있지 않은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만에 하나 출입문이나 스크린도어, 조작반, CCTV 등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그만 문제만 있어도 승무원들은(기관사, 차장) 바로 관제사에게 보고하고, 관제사는 역, 주변 열차 승무원, 시설 유지보수 인원과 같은 관계 직원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지시한다.

스크린도어 하자를 보수할 수 없었던 이유

스크린도어는 이 모든 과정에서 승객들을 안전하게 지킨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스크린도어에 하자가 생겨도, 철도 직원들이 직접 보수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1호선에서 있던 일이다. 가산디지털단지역 스크린도어는 한 해에 수십 번이나 열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작반과 CCTV 상태가 너무 나빠 상황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승무원들은 2020년부터 4년째 꾸준히 철도공사 사측에 상황을 제보해 왔고, 갑갑한 마음에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 안건을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보수를 할 수 없다는 답변뿐.
 
 오후 시간 가산디지털단지역 승강장의 기관사용 CCTV. 맑은 날에 촬영되어 반사가 심하다.
오후 시간 가산디지털단지역 승강장의 기관사용 CCTV. 맑은 날에 촬영되어 반사가 심하다. ⓒ 철도노조 구로승무지부
 
 가산디지털단지역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조작반응. 흐린 날에 촬영되어 그나마 반사가 덜하다.
가산디지털단지역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조작반응. 흐린 날에 촬영되어 그나마 반사가 덜하다. ⓒ 철도노조 구로승무지부
 
해당 역은 민간업체가 유지보수 업무를 한다. 민간업체 관할 시설물에 철도공사가 자기 돈을 들여 유지보수를 했다간 '배임'이 되니, 공사는 보수를 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배임인지 따져 물었다. 사측은 '이들 역은 스크린도어에 붙인 광고수익을 가져가는 대신 민간업체가 유지보수를 맡기로 계약이 돼 있다'고 했다. 이어 '해당 계약이 끝날 때까지 CCTV나 조작반이 보이지 않아도, 스크린도어에 문제가 생겨 매일같이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도 보수할 권한이 없다'는 요지로 답했다.

승무원들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어느 날 무사고 백만 킬로미터를 달성했던 베테랑 기관사가 스크린도어 일부가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해 승객들이 타고 내리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백만km를 무사히 달리다 처음 범한 과실이지만, 철도경찰은 해당 기관사를 입건하더니 과태료를 부과하고 사흘 만에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 책임을 진 것은 오직 기관사 개인뿐이었다. 역 시설 유지보수의 책임을 진 민간업체도, 철도를 운영하는 철도공사도 자기 책임이라며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문제의 스크린도어 하자는 오늘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공포스러운 철도 운영과 시설유지보수 업무의 분리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시설 유지보수 업무를 외주 민간업체에 위탁해 철도공사와 분리된 회사가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는 아직 일부 역사와 시설물에 국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철도 노동자들은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식을 들었다. 국회가 철도 유지보수 업무 전체를 철도공사에서 분리할 법적 근거를 만든다는 것이다. 철도산업발전기본법 38조에 따르면, '철도시설유지보수 시행업무는 철도공사에 위탁'한다. 이 조항이 없다면, 철도 시설 유지보수 업무를 조각 내 아무 업체나 외주화해도 무방하다.

나와 동료들은 우려를 넘어 공포를 느꼈다. 향후 외주 업체와 철도공사 간의 책임 공방은 불을 보듯 뻔하다. 스크린도어 문제와 같이 손 볼 곳이 크지 않은 곳도 4년 동안 방치될 정도였다. 만약 그 사이 일이 꼬여 문제가 생기면 노동자 개인이 모든 걸 책임지고 부담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과태료가 아니라 실형, 아니 현장 노동자의 목숨으로.

사실 스크린도어 하자는 철도 안전 시스템 전체에서 사소한 부분일 수 있다. 천 명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싣고 달리는 수백 톤짜리 쇳덩어리가 열차 아니던가? 무게 만큼 책임도 무겁고, 그 책임만큼 시스템은 섬세하다. 일부 승객들이 객실에서 잠시 잠에 빠진 사이, 기관사와 승무원은 열차 진동이 평소보다 심해진 것은 아닌지 늘 신경 써야 한다. 전 차선에 걸린 비닐이나 풍선을 놓치면 차량의 전기 장치가 파괴될 수도 있다. 신호나 진로에 오류가 있다면 긴급히 멈춰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즉시 관제에 보고를 해야 하고, 시설과 신호, 전기, 차량 등 각각의 업무를 담당한 직원들이 직접 차량과 시설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
 
 스크린도어와 조작 관련 설비의 기능 고장 보고. 2023년 상반기에 철도공사에 '휴먼에러 사고 장애 예방 조사'를 위해 올라간 지속적인 보고로, 기관사들이 수기로 작성한 것이다.
스크린도어와 조작 관련 설비의 기능 고장 보고. 2023년 상반기에 철도공사에 '휴먼에러 사고 장애 예방 조사'를 위해 올라간 지속적인 보고로, 기관사들이 수기로 작성한 것이다. ⓒ 철도노조 구로승무지부
 
가끔 상태를 살피기 위해 선로에 긴급 출동한 작업자를 발견해 아찔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각각 직무가 다른 철도 직원들이 서로 다른 회사에 속해있다면 어떻게 될까? 문제가 생겼을 때 머릿속에 '이 문제는 누구 책임인지, 나와 내 회사가 책임을 모면할 방법'부터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남의 회사 사람들이라면, 선로 위 작업 과정에서 소통조차 어렵지 않을까?

이런 우려는 그저 머릿속에서 지어낸 게 아니다. 2017년 기관차 추돌사고를 보자. 당시 국가철도공단은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자신이 공사 중인 경강선 신호 시스템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운전을 했는데, 이때 열차가 추돌해 철도공사 기관사가 순직했다. 문제의 신호 시스템에 있던 오류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고, 안전 절차도 현장에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2018년에 발생한 강릉선 KTX 탈선사고도 있다. 당시 국가철도공단은 탈선 지점의 신호 시스템을 잘못 시공했고, '철도공사와 함께 시스템을 확인해야 한다'는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건설 업무와 열차운영만 분리돼도 이렇게 손발이 맞지 않아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앞으로 일상적인 유지보수 과정까지 분리된다면 노동자들은 과연 안전하게 퇴근할 수 있을까? 승객들은 언제까지 철도를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2017년 9월 13일 경강선 개통을 위한 중앙선 시험운전열차 추돌사고 현장. 당시 철도공단은 신호설비를 개량하면서 소프트웨어는 부실하게 검증되었고, 기관 간 안전절차 미비 등 현장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방침도 충분히 전달, 확인하지 않았다.
2017년 9월 13일 경강선 개통을 위한 중앙선 시험운전열차 추돌사고 현장. 당시 철도공단은 신호설비를 개량하면서 소프트웨어는 부실하게 검증되었고, 기관 간 안전절차 미비 등 현장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방침도 충분히 전달, 확인하지 않았다. ⓒ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분리와 위탁, 쪼개기라는 독극물

19세기부터 이어진 철도의 역사는 곧 통합 시스템을 통해 안전을 만들어 온 역사다. 기관사나 관제사 개인은 실수할 수 있다. 이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중요하다. 신호, 전기, 궤도, 차량, 관제 등 철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하나의 사업자가 통합 운영하는 것이 지난 철도 역사를 통해 입증된 방법이다.

그런데 유지보수를 여러 사업자로 분리하고 외주화하면, 가산디지털단지역 스크린도어와 같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안전공백이 철도 현장에 점점 더 늘어날 게 자명하다. 이 틈을 기관사 개인의 역량과 운으로 메우겠다는 계획이라면, 옛날 옛적 사고가 숙명인 줄 알았던 시절로 철도의 시계를 되돌리겠다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철도 쪼개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현장 노동자들은 이미 그 위험을 맛볼 만큼 맛보았다. 이처럼 끔찍한 독극물의 맛을, 우리는 철도를 안전하다고 믿고 매일 이용하는 시민에게 차마 권할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인 정주회는 공공운수노조 철도노조 구로승무지부장입니다.


#철도#스크린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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