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수묵으로 그려진 고깃배 서너 척은 평생 어부셨던 친정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고향 군산에서 개인전을 여는 김승호 한국화 화백의 작품이었다. 어느 겨울 만선으로 돌아오던 아버지의 고깃배에서 춤추던 오색의 깃발을 환영하며 모여든 군산 째보선창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선창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여 옛날의 영화로움을 찾을 수는 없지만 김 작가의 그림 속에 정박한 배들은 '가보자, 저 바다로'라는 선장의 고함소리만 들려오면 바로 출발하려는 심장을 가진 살아있는 생물체 같이 보였다.
군산 예깊미술관에서 '김승호 초대전(2023.11.24.-12.30)'이 열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역인들에게 미술문화공간을 함께 공유하고픈 마음이 일어 김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후 그를 만났다. 처음 만난 분인데도 지역의 후배를 대하는 그만의 친화력은 그의 대표적인 시골마을 풍경 작품처럼 온화하고 청명한 한 줄기 겨울 햇빛 같았다.
대학 전공이 물리교육, 중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 33년. 그가 어떻게 미술 한국화의 전업작가로 살고 있을까. 그가 교직에 있으면서도 수묵화에 끌려 그림을 시작하게 된 것이 약 36년 전이라고 했다. 중고등학생 학창 시절에도 미술 재능이 있었는데, 당시의 가정상황에 따라 이과를 선택하면서 평생을 교사로서, 현실적인 삶을 충실히 살았다고 했다.
10여 년 전 교사 퇴직을 하고 난 뒤 그는 전업작가로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에서 개인전 34회, 단체전 500여 회, 아세아 미술 초대전 6개국 순회 등의 경력을 지닌 그는 자신을 '다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과학전공자가 뒤늦게 미술이라는 독점적 영역 안에 들어가기까지 어려운 과정이 있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 이번 군산에서의 전시회 목적이 있으신가요?
"올해 봄, 고향친구를 만나 월명산 수시 탑과 째보선창을 다니면서 옛날 이야기와 앞으로의 희망을 얘기했는데요, 그냥 친구들이 보고 싶고, 젊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전시회를 하면 친구들을 만나는 시공간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군산이 고향이라서 무조건 좋다고 하시지만 특별히 군산의 좋은 점을 말씀하신다면요?
"저는 전형적인 농촌문화인 개정들판에서 자랐지만 군산하면 고군산도를 중심으로 역동하는 바다와 항구가 있는 곳이지요. 농촌에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면 항구에는 생동하는 기운이 있고요, 군산은 이 둘의 특성을 절묘하게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 작가님의 그림 중에서 특별히 항구에 있는 고기잡이 배를 그린 작품을 보고 이곳을 찾았는데요, 농촌에서 사신 작가님이 군산 째보선창(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도 거명)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으세요?
"친척이 이곳에서 어판일을 하셔서 배의 사진들을 종종 보내주셨죠. 저는 배가 가지고 있는 생동하는 필선을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림 초기에는 사군자를 그리면서도 항구나 배 그림을 많이 그렸고요, 특히 겨울날 항구의 모습을 그릴 때는 겸허한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군산에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마음으로는 '100호 100전'을 하고 싶었다는 김 작가. 그의 작품 스케일은 그림에 문외한인 나를 감흥시켰다. 1호 작품의 기준을 알고 나니 100호 작품의 크기에 놀랐고, 또 100전을 준비하려 했다는 그의 기백과 자신감에 또 한번 놀랐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공간상의 제약으로 100호 작품 30여 점과 소품 3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선창에 정박한 배의 그림 3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은 어느 시골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이다.
- 풍경그림이 많은데요, 실재하는 곳인가요? 상상 속의 마을인가요?
"제 그림들의 주제는 '편안함'과 '평범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교직 첫 발령으로 간 무주의 어느 깊은 산골 풍경은 지금도 뚜렷할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산골이나 농촌마을인데도, 그곳에 들어섰을 때, 지붕 위로 흘러나오는 한 줄기 연기로도 따뜻한 위로와 편안함을 느끼죠. 제가 함께 누리고 싶은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 정말 행복합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그림을 그려서 저절로 다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 어느 작품 평론가의 글을 읽으니, 작가님을 가리켜 '수필을 쓰듯 그림을 그린다'라는 평가가 있던데요, 작가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맞습니다. 소소한 일상을 글로 표현한 것이 수필이라면 제 그림 역시 평범하고 소소한 삶의 단면들을 그린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림을 그릴 때 여백을 두어 누구라도 다가와서 그 빈공간에 마음의 붓질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살고 싶습니다. 제 그림을 두고 호당 가격이 얼마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구매자가 스스로 가격을 매겨도 좋으니 추억과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전시회가 되길 바랍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쓴 윤동주와 그의 시 <별 헤는 밤>을 좋아한다는 김 작가. 하지만 그의 시골풍경 작품에서는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이야기>, 정지용 시인의 <향수>,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를 만날 수 있었다. 김 작가의 외가집이 있었던 마을 뒷산에 피어난 노란 산수유꽃이 두드러진 작품 <오성산 아랫마을>, 금방이라도 소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작품 <아산리 김씨목장>은 저절로 그림 따라가 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선품 - 신선이 그린 듯한 그림의 품격 - 그런 그림이 실제로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경지에 가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로서, 그것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물 흐르듯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고 말하는 김승호 작가.
고향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은 분명 남다른 미술문화공간이었다. 송년을 앞두고 올해 다사다난했던 모든 일들이 그의 작품을 만나면서 해갈되고 평온해짐을 느낀 하루였다. 주말 동안 더 많은 지역인들이 찾아와 관람하면서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풍경의 추억을 되살려보고 혹시라도 스쳐지났을 옛 사람의 정을 마주잡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YEGIP ART OF MUSEUM
예깊미술관
김승호 초대전
2023.11.24.- 12.30.
군산시 번영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