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완전월급제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 사망한 해성운수 택시노동자 방영환씨가 영면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었다. 고인의 죽음 이후에 해성운수의 불법 사실이 하나 둘씩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해성운수 대표이사가 지난 12월 11일 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회사가 여전히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유족은 아직까지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사망 이후에야 아버지를 비로소 만나게 된 유족이,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투쟁을 벌이며 보내온 글을 싣는다.[편집자말] |
시위니 집회니 관심도 없었다. 그냥 먹고살기 바빴다. 아빠 없이 자라 더 악착같이 살아왔고, 남 일에 관심 가질 시간도 없었다. 지난 10월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아빠의 사망 소식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쩔 줄 몰랐다.
어릴 적 헤어진 아빠, 그런데 그 핏줄이 뭐라고, 한편으론 보고 싶기도 그립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를 찾는 일은 어려웠다. 소식 한번 듣기도 어려웠다. 살아서는 닿지 못하던 인연의 끈이, 아빠가 돌아가셔서야 연결됐다.
곧바로 병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아빠의 동료분들로부터 그동안의 아빠 삶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 포털 사이트에 아빠 이름을 검색하며 모든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댓글 하나까지도 읽었다. 평소 뉴스도 잘 안 보는 내가, 잠도 잊은 채 모니터 속 아빠의 삶을 되짚으며 읽고 또 읽었다.
아빠 없이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생활의 무게가 짓누를 때마다 아빠가 조금씩 미워졌다. '게으르게 살고 있을 거야. 열심히 살고 있다면 왜 나를 안 찾겠어. 떳떳하지 못하니 그렇겠지.' 상상이 거듭될수록 아빠에 대한 미움은 커졌다.
미워했던 아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밤을 새워가며 기사 하나하나를 정독하다 알게 됐다. 우리 아빠, 진짜 열심히 살고 계셨구나. 다음 날 아빠의 동료들께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내게 딸이 하나 있으니 혹여나 잘못되면 딸을 꼭 찾아달라'는 말씀을 전했단다. 그러면서 '딸에게 해준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며 날 찾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딸의 앞날을 망칠까 봐' 그랬단다.
눈물이 쏟아졌다. 나를 잊지 않고 사셨다는 마음에 그동안의 미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라도 아빠의 진심을 알게 됐다. 난 아빠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아빠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아빠의 투쟁이 공정했다는 것을 꼭 알리고 싶었다.
기록으로 만난 우리 아빠는, 힘없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앗아가며 부자가 된 악질 기업을 규탄했다. 불법을 일삼는 회사에 맞서 정의를 위해 싸웠다. 회사 대표의 지속적인 괴롭힘과 폭언, 폭행, 모욕에 맞서왔다.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서울시에 진정을 넣었다. 경찰에 신고도 여러 번, 법원에 소송도 여러 개, 그렇게 끈질기고 당당하게 싸우시던 아빠는, 회사대표의 횡포와 국가의 무관심에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나셨다. 아빠가 목숨을 내던지며 세상에 건넨 요구는 단 하나였다. 있는 법을 있는 대로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기자회견에 서고 집회에 참석했다. 구호도 외칠 줄 모르던 나는 그저 흉내만 내며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행진할 때 차가 막힌다며 욕설을 하시는 분도 계셨다. 집회 때마다 시끄럽다며 목소리 높여 화를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많은 사람 속에 함께 서도 이렇게 기가 죽고 작아지는데, 아빠는 홀로 회사 앞에서 3년 가까이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셨다. 임금체불로 227일 동안 1인 시위를 하셨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빠 곁에 함께 서서 지켜주고 싶단 생각을 수만 번 넘게 반복했다.
가장 힘든 건 꿈쩍도 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장례까지 미루며 아빠가 생전에 그토록 원하셨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싸우고 있지만 작은 변화조차도 더뎠다.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분신하셨는데 관심도 없다. 서운하고 속상했다.
11월 11일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발언했다. 3만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긴장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사람들이 나의 절절한 이야기에 과연 귀를 기울여 줄까 하는 걱정이었다. 손과 입이 꽁꽁 얼 만큼 추웠던 날씨에, 많은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아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핸드폰에 코를 박고, 옆 사람과 떠들며 앞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속상했다. 그때 갑자기 파란 조끼를 입고 지나가던 어떤 아저씨께서 나를 보며 "투쟁!"하시며 큰 소리를 외쳐주셨다. 울컥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 사람이라도 내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에 감사하고 힘이 났다. 내 생에 '투쟁'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힘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노동청도, 서울시도, 경찰도, 회사도, 그들 모두 무관심으로 아빠의 죽음을 대했다.
조금씩 생긴 변화... 다시 한번 다짐한다
조금의 진전도 없는 싸움이 이어지며 지칠 때쯤 그제야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임금체불 문제로 진정서를 제출한 아빠의 외침에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고 무혐의 처분을 내려 아빠에게 좌절을 안겨준 노동청이 임금체불과 위법 사실을 판정했다. 아빠의 민원과 시위를 무시하던 서울시도 이제야 조사에 나섰다. 지금껏 회사의 폭언과 폭행, 협박, 모욕 등을 묵인해 왔던 경찰도 부랴부랴 수사했다.
결국 12월 11일 해성운수 정승오 대표이사가 구속됐다. 캄캄하게 앞이 보이지 않던 아빠와 나의 투쟁에 비친 한 줄기 빛이었다. 구속영장이 청구된 날 그토록 보고 싶던 아빠가 꿈에 나왔다. 예쁜 노을이 지는 바다 앞에서 내 손을 쓰다듬으며 연신 '고맙다'고 하신다. 잠에서 깬 나는 아빠의 뜻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택시 완전 월급제 이행과 불법 악질 기업 사용자 처벌, '법에 있는 대로 법을 지키라'는 아빠의 외로운 투쟁 구호를, 이제 하나뿐인 가족이자 딸인 내가 대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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