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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서울현충원에서는 시민 100명이 모여 서울의봄 및 12.12 특별 현충원 투어를 진행했다.  사진은 12.12 전사자 김오랑 중령 묘 앞.
9일 서울현충원에서는 시민 100명이 모여 서울의봄 및 12.12 특별 현충원 투어를 진행했다. 사진은 12.12 전사자 김오랑 중령 묘 앞. ⓒ 권택상
 
지난 12월 9일 현충원 투어를 진행했습니다. 개인적으로 2018년 이래 31차를 맞이한 투어였음에도 이날은 유독 더 특별했습니다. 서울과 부산, 창원, 울산, 포항, 목포, 광주, 대구, 대전 등에서 1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해서인데요. 당일 투어의 주제가 바로 영화 <서울의봄>과 12·12였습니다(관련기사: '서울의 봄' 정해인 실존인물 보려고, 서울현충원에 100명 모였다 https://omn.kr/26pd6). 

영화 <서울의봄>에서 배우 정해인이 연기한 오진호 소령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김오랑 중령의 묘를 시작으로 반란군에 맞섰다 사망한 정선엽 병장, '백비'가 세워진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의 묘 앞에 섰습니다. 이들 묘 앞에 서서 시민들 서명이 담긴 태극기를 펼친 뒤 미리 준비한 유기잔에 술을 가득 부어 올렸습니다. 이어 "반란군에 맞서 싸운 참군인을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이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5시간이 넘는 투어를 마칠 무렵 현장에 있던 한 시민이 제안하더라고요. "오늘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 정병주 장군을 만났으니 새해에는 배우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 수경사령관의 실존 인물인 장태완 장군도 만나러 대전현충원에 가는 것은 어떠냐"라고.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서울현충원 투어를 진행한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일본 NHK를 비롯해 엄청나게 많은 곳에서 연락을 받고 있습니다. '대전현충원 투어는 언제 하는 거냐'부터 '서울현충원 투어는 또 안 하냐', '다시 한다면 나도 가도 되냐'까지. 

저는 <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바꿔 말하면 자의든 타의든 출퇴근 길이면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신문과 뉴스를 살피는 게 일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난 현충원 투어 이후로 바뀐 풍경이 하나 있습니다. 반란군에 맞섰던 이들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발견한 것이 장태완 장군의 수기입니다. 장 장군이 12·12 군사반란 후 8년이 지난 1987년 심장 이상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병상에서 일주일 만에 쓴 글로, 1993년에 발표한 <12·12 쿠데타와 나>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기자 주 - 현재는 절판 상태로 국회도서관 등에서 구할 수 있음).

'죄인' 장태완이 목숨 걸고 남긴 수기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예비역 육군소장.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예비역 육군소장. ⓒ 이종호
 
장 장군이 남긴 수기에는 12·12 그날의 기록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장 장군의 통렬한 필체로 온전히 담겼습니다. 그런데 수기에서 가장 놀랐던 점은, 장 장군 스스로 그날 반란군에 맞서 싸웠던 몇 안 되는 참군인이었음에도 자신을 반복적으로 '죄인'으로 표했다는 사실입니다.
 
12·12 군사반란을 진압시켜야 하는 정부 계엄군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진압작전을 지휘하다가 실패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된 장본인으로서 그 당시의 실증적인 증언을 국민 앞에 공개해 발생원인과 진상을 규명하고 진압 실패의 원인과 교훈을 도출하는데 일조가 되어 다시는 이 땅 위에서 12·12 군사반란과 같은 불행한 역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면 국가와 국민, 그리고 국군 앞에 지은 불충의 죄를 일부나마 속죄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장 장군은 12·12로 인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동료 장병들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리고 12·12 후 이어진 5·18에서 희생된 영령들에게도 속죄한다는 말을 합니다.
 
동료였던 반란군의 총탄에 맞아 순직 또는 부상의 불이익을 당하고도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떳떳한 보상과 명예회복 조치를 받지 못하고 있는 원혼 및 당사자, 그리고 그 유족들에게 속죄의 길이 되고 또한 나 자신이 군사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불찰로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영령과 유족들에게도 경건한 심정으로 깊이 고개 숙여 속죄를 빌고 싶다.

자신을 죄인이라 칭한 장 장군, 그 역시 12·12 반란군을 막다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한 다른 전우들처럼 불우한 삶을 살다 떠납니다.

국군 최고 요직 중 하나인 수도경비사령관에 부임한 지 24일 만에 전두환과 하나회가 주도한 12·12 쿠데타가 발생했고 목숨을 걸고 막으려 했으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패하고 맙니다. 결국 13일 새벽 3시 40분께 장 장군은 자신의 직속 부하였던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체포되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압송됩니다.

보안사에서 두 달간의 감금 생활이 이어졌고 장 장군은 1980년 2월 5일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전역지원서를 쓴 다음에야 풀려납니다. 그리고 이날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전두환을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전두환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1979년 12월 14일 12.12 쿠데타 주역들이 보안사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1979년 12월 14일 12.12 쿠데타 주역들이 보안사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오마이뉴스 재편집
 
전두환 = "장 선배가 한강 교량을 막는 바람에 지금 금값이 얼마인 줄 압니까? 국제여론도 아주 좋지 않습니다."

장태완 = "그날 밤 연희동 요정으로 우리(장태완·김진기 헌병감·정병주 특전사령관)를 초대했었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를 연금시킬 수도 있었던 일 아니오? 그런데도 당신들은 내 발로 내가 지휘할 수도 있는 부대로 갈 수 있도록 놔두었으니 나로서는 의당 죽기 전까지는 나의 기본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오."

전두환 = "장 선배! 사실 밑에 사람들은 장 선배를 연금시키자는 것을 내가 야단쳤어요. 그 어른은 우리가 모시고 큰일 함께할 분인데 그렇게 하면 되냐. 내가 책임지겠다 했던 것인데 그만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난처했는지 모릅니다. 장 선배가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다음 날 장 선배를 중장으로 진급시켜서 군단장으로 내보내려고 했던 겁니다. 집에 가서 6개월 동안 쉬고 있으면 저희들이 일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 <12·12 쿠데타와 나>에서

전두환의 말대로 장 장군은 풀려났지만 반년 동안 보안사 요원들의 감시 속에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가택연금이 풀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에 있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버지는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끌려간 아들의 소식을 TV뉴스를 통해 접했고, 이후론 곡기를 끊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엔 더 큰 시련이 찾아옵니다. 자신의 보물이자 자랑이었던 아들마저 잃습니다. 장 장군의 아들 성호는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했던 수재였지만 1982년 1월 부친의 무덤 근처인 경북 왜관의 낙동강 인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아들의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부친과 아들을 떠나보낸 뒤 장 장군은 삶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딸과 부인이 남아 있었고, 모진 목숨을 부여잡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습니다. 그러나 매일이 고통의 연속이었고 수면제로도 잠을 이룰 수 없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독한 술을 들이켰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학대한 결과 심근경색이 왔고 결국 심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겁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기 직전 병상에서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수기를 완성합니다.

수술을 받은 장 장군은 다행히 살아남습니다. 살아남은 장 장군은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전두환·노태우 등 군사반란에 참여했던 34명을 반란 및 항명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합니다. 그러나 이듬해 검찰은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하면서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며 관련자들을 기소유예하거나 불기소 처분했습니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의 요구는 비등했고, 결국 1995년 12월 '5·18특별법과 공소시효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합니다. 역사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깁니다.

장 장군은 1994년 사상 처음 경선으로 진행된 27대 재향군인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로 국회의원도 됐습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의 보훈특보를 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됐고 결국 2004년 정계를 떠납니다. 장 장군은 2010년 7월 26일 79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뒤 1년 6개월 뒤인 2012년 1월 17일, 우울증 등을 앓던 장 장군의 부인 이병호씨는 거주하고 있던 아파트 10층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삶을 마감합니다. 이씨는 "미안하다. 고마웠다. 오래오래 살아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습니다.

참군인을 찾아서... 2024년 1월 13일 다시 현충원으로
 
저는 반란군에 맞서 싸웠던 '참군인' 장태완 장군을 만나러 2024년 1월 13일 대전현충원에 내려갈 생각입니다. 전국에서 모인 여러 시민과 함께 그의 묘 앞에 서서 반란군에 맞서 싸운 참군인의 삶이 어땠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홀로 견뎌냈는지 말해 줄 생각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역사가 기억해야할 진짜 군인이 누구인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다행히 지난 서울현충원 투어에 이어 이번에도 100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동참하겠다는 뜻을 미리 알려왔습니다. 매서운 한파가 예상되지만 마음 다해 장 장군 영전에 술 한 잔 가득 부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진짜 참군인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가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습니다."
  
 2024년 1월 13일 진행 예정인 서울의 봄·12.12 특별 대전현충원 투어 - “참군인을 찾아서” 포스터
2024년 1월 13일 진행 예정인 서울의 봄·12.12 특별 대전현충원 투어 - “참군인을 찾아서” 포스터 ⓒ 김종훈
 
서울의 봄·12.12 특별 대전현충원 투어 - "참군인을 찾아서"

- 일시 : 2024년 1월 13일(토) 11시 ~ 15시 30분 (현장 상황에 따라 연장 가능)
- 만나는 장소 : 대전현충원 '현충문' 앞 / 개별 이동
- 투어순서 : 현충문 : 전두환과 노태우, 하나회 설명 >> 홍범도 장군 >> 맞서 싸운 군인 장태완 >> 무력했던 이들 >> 12.12 반란군들 >> 원수 최규하 >> 친일 군인 >> 잊어선 안 되는 광복군 
- 해설 : 김종훈 기자 / 임정로드, 약산로드, 현충원한바퀴 저자
- 신청 : https://url.kr/q1hicb (조기 마감될 수 있습니다.)
- 문의 : rian0605@gmail.com 

* 공익 목적의 무료 행사입니다. 현장에서 드실 간식 및 음료는 각자 지참해야 합니다.

#장태완#서울의봄#현충원#정우성#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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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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