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밥 맛있니?" - "네~"
"맛있게 먹어라" - "네~"
"근데, 너 저번에 다이어트 중이라고 했잖아, 이 소시지도 먹을 거야?"
"아~~진짜, 왜 그러세요. 짜증나게.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데."
"내 얘기가 짜증나니?" - "네."
"......"

예상치 못한 낯선 대화였다.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았는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우리의 대화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밥을 먹은 뒤, 나오는 길에 전공과(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한 특수교육대상자에게 진로 및 직업교육을 제공하기 위하여 수업연한 2년으로 설치된 과정) 학생에게 몇 마디 건넨 것인데, 나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밀려드는 서운한 감정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 여학생에게 다이어트는 민감한 사안이다. 살찌지 않기 위해 점심도 굶은 적이 있다. 분명히 소시지를 눈앞에 두고 심각한 갈등에 처했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에 그냥 입에서 불거진 말을 툭 뱉은 것이다. 그래, 맞다. 내가 그 학생을 짜증나게 했다.

사실, 나도 '짜증나게'라는 말을 듣고 관계의 상실감을 느꼈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 그 학생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쌀쌀한 태도로 그 학생 곁을 지나쳤다. '짜증나게'라는 단어 하나에 내 마음이 휘둘렸다. 이는 가부장제의 권력에 내 몸이 익숙한 탓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교실에 조금 일찍 들어갔는데 한 학생이 나를 "샘!"이라고 불렀다. 요즘말로 꼰대의 기질이 다분한 나는 훈계를 늘어놓았다. "샘이 뭐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든지, 홍길동 선생님이라고 하든지 올바른 호칭을 사용해야지, 알았지?" "……" 나는 말을 쏟아부었고, 학생은 말없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교사라는 점이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랬다. 교육도 교사와 학생의 만남에서 출발한다. 그 만남은 대화가 생명이다. 대화는 시대가 나에게 입혀 놓은 가부장제의 옷을 걸치고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가부장적 대화는 교사의 말에 굴복을 강요하고, 학생의 말을 억압한다. 그리하여 학생은 끝까지 입을 다물어버리기 때문이다.

해서, 학생들이 말하고, 나는 경청하는 프로젝트 수업을 계획했다. 전공과 학생들은 2주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탐색했으며, 그 탐색한 것을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나는 그 목소리, 그 몸동작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생들은 진솔했으며 용감했다. 자기 얘기를 하는데 한 사람당 주어진 10분은 턱없이 부족했다.
  
  학생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학생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 김국현
 
엄마에게 반찬 못 만든다고 맨날 잔소리하는 아버지가 정말 밉다는, 미움에 대한 이유. 엄마랑 버스를 타고 외출하면 엄마가 자신을 버릴 것 같아서 불안하다는, 눈물을 담은 고백. 손목시계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을 수 없는 소유욕. 낯선 제주도에서 가족이랑 한 달간 살고 싶은,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 하고 싶은 말을 공책에 기록해 두었다가 결국 그것까지 다 끄집어내고 마는, 말하고 싶은 욕망. 밥 먹는 중에 물 떠 오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다는, 방해 금지 모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살아있는, 자유로움의 몸짓.

아! 그게 너였구나! 귀 기울여 들어야만 알 수 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이야기들이 아직도 내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학생들의 삶이 내 삶에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했다.

겨울방학 전날, 나는 내가 다른 학교로 이동한다는 얘기를 학생들에게 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도 1년 후엔 졸업인데, 샘은 의리도 없이 혼자 가시네요. 배신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울컥했다. '배신자' 그 말이, 나에게는 그동안 너와 나의 관계가 두터웠다는, 친구처럼 동등했다는 증언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 증언은, 낯설게 말을 걸어오는 학생들에게 토라지지 말고, 부지런히 응답하며, 자신들을 포용하라는 나에게 주는 깨우침이었다.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교사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기도 했다. 그 깨우침과 바람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 기억의 힘으로 새해를 기대해 본다.

#가부장제#교사의권력#교사와학생관계#특수교육#교사의언어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특수교육 교사이며,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휠체어를 탑니다. 그동안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을 글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장애를 겪으며 사는 내 삶과 교육 현장을 연결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