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거시켜. 전부 퇴거시켜."
서울교통공사 센터장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참가한 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여기에는 활동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있었다. 공사 보안관 서너 명이 이들의 팔다리를 붙잡고 강제로 끌어내자, 일부 시민들은 바닥에 팽개쳐지거나 계단 앞에서 밀려 넘어졌다.
"제가 뭘 했습니까! 무슨 근거로 퇴거시키는 겁니까!"
2일 아침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 전장연이 새해 첫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나섰다. 이날 공사는 전장연 활동가와 시민들을 가리지 않고 시위에 참가한 이들을 승강장 밖으로 끌어냈다. 시위 내내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말싸움을 벌이던 공사 센터장은 "전장연 불법 시위는 이동권 문제가 아니다"라며 휠체어를 탄 장애인 활동가들의 퇴거를 지시했다.
강제 퇴거 직후 <오마이뉴스>와 만난 시민 이채완(26)씨는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제11조를 승강장에서 외쳤을 뿐인데 보안관들이 제 팔다리를 꺾어서 짐짝처럼 계단으로 질질 끌고 갔다"고 말했다. 시민 최보근(22)씨도 "장애인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외치니 보안관 서너 명이 팔다리를 잡고 저를 끌고 가 대합실 앞에 내동댕이쳤다"고 했다.
전장연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 70여 명(주최 측 추산)은 이날 성신여대역, 한성대입구역, 동대문역에서 혜화역으로 모이기 위해 지하철 탑승을 시도했으나 경찰 기동대와 공사 보안관의 제지에 가로막혔다. 혜화역 보안관들은 시위가 시작되기도 전에 안전 발판을 방패 삼아 장애인 활동가 네다섯 명을 둘러싼 채 휠체어 이동 및 지하철 탑승을 막았다. 경찰은 이날 기동대 2개 부대(부대당 60여 명)를, 공사는 보안관 70여 명을 혜화역에 배치했다.
"권리중심일자리 해고 철회하라"... 오는 22일 다시 지하철 탄다
이날 승강장에서 전장연 활동가들이 발언할 때마다 혜화역장은 퇴거를 요구하며 "고성방가, 소란행위 등을 즉시 중단하라"는 경고 방송을 반복적으로 내보냈다. 활동가들이 모여 있던 혜화역 5-3 승강장 앞에는 '철도종사자의 허가 없는 역사 내 연설, 권유 행위는 철도안전법에 의해 퇴거 조치될 수 있다'는 노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이날 오전 8시 25분께 장애인 활동가들이 지하철 탑승을 시도하기 위해 승강장 앞으로 휠체어를 이동시키자, 경찰과 공사는 이들을 둘러싸고 탑승을 제지했다. 공사 센터장이 "불법 시위자가 무슨 지하철을 타냐", "왜 정초부터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냐"며 퇴거를 요구할 때마다 박경석 대표는 "장애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주십시오", "지하철 태워주십시오"라고 외치며 버텼다. 이날 시위는 30분가량 지속됐으며 별도의 경찰 연행은 없었다.
전장연은 지난해 12월 1일부터 국회 예산 심의가 끝날 때까지 지하철 탑승을 유보하며 혜화역에서 '침묵 선전전'을 벌여왔다. 그러나 장애인콜택시 증액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서울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공공일자리) 장애인 노동자 400명에 대한 해고가 단행되자 이날 다시 출근길 시위에 나섰다.
전장연은 지난해 내내 특별교통수단(장애인콜택시) 예산으로 차량 1대당 운전원 2명의 인건비(16시간 운행)가 포함된 3350억 원을 요구했으나, 국토교통부는 2024년 예산안에 단 470억 원을 편성했다. 전장연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합의된 741억 원(271억 원 증액안)이라도 반영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장연에 따르면 2024년 장애인콜택시 예산은 약 9억 원 증액된 데 그쳤다.
이날 박경석 대표는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한 271억 원 증액안마저 윤석열 정부는 거부하고 없애버렸다"면서도 "장애인콜택시 등 장애인권리예산과 관련해서는 출근길 지하철을 타지 않겠다. 다만 오 시장이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의 해고를 철회하고 대화에 나서지 않는다면 오는 1월 22일 다시 출근길 지하철을 타겠다. 매일 출퇴근길 서울 시내 전 역사에서 선전전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수미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활동가는 "최중증발달장애인이 돈을 벌어 친구 관계를 맺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며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오 시장의 한마디로 폐기됐다"며 "장애인이 지역사회가 아닌 거주시설에 들어가거나 집에 처박혀 살라는 의미밖에 더 되냐"고 지적했다.
전장연은 지난 2021년 12월 3일부터 이날까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비롯해 장애인권리예산(이동권, 노동권, 교육권, 탈시설 예산) 반영을 요구하는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벌여왔다. 햇수로만 4년째, 이들은 올해도 새해를 맞아 출근길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승강장에서 다시 한번 외쳤다.
"시민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4년은 총선의 해입니다. 저희는 2001년부터 23년째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고 있습다. 장애인도 이동하고 싶습니다. 교육받고 싶습니다. 일하고 싶습니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고 싶습니다. 올해는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투표해 주십시오."
이날 '제56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마친 전장연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대화에 나서지 않을 시 오는 1월 22일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3주기를 맞아 오이도역에서 '제57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진행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이날부터 오는 4월 10일까지 2024총선장애인차별철폐연대 출범, 장애인 참정권 운동 등 장애인 권리를 알리는 '나는 장애 시민 권리에 투표한다'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