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인 내게 원래 매년 12월은 매일 카운트다운을 세는 나날이었다.
"얘들아, 한 달만 지나면 옆 짝꿍이랑 헤어져."
"이제 얼굴 볼 날이 15일밖에 안 남았어."
"이제 6일도 안 남았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남은 날들을 되새기며 얼마 안 남은 인연을 더 소중하게 대하기를 바랐다. 그래서였을까. "3학년 올라가기 싫어요!", "선생님이랑 헤어지기 싫어요"하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던 아이들이 정작 헤어지는 날이 오니 오히려 의연했다. 며칠 전부터 오늘이 되면 울 것 같다던 이진이(가명) 역시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아이들에게 아쉬운 표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헤어짐의 안타까움보다는 3학년 때 어느 반이 되었는지, 어떤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는지에 훨씬 관심이 더 커 보여 살짝 배신감마저 들었다.
한 학년을 마치는 날. 봄에 씨앗을 뿌리고 뙤약볕에 농사를 일궈 선선한 바람이 들즈음, 알알이 영근 낟알들을 주렁주렁 매단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이 이럴까. 일 년 동안 함께 했던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날이 되면, 나라는 프리즘을 통과해 다양한 빛을 내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이 부시다. 또 이렇게 무탈히 한 해를 보냈구나. 천둥벌거숭이들 같던 아이들이 많이 자랐네. 썩 의젓해지고 참을성도 늘고... 지난 3월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새삼 뿌듯해진다.
1년 동안 훌쩍 큰 아이들
'마지막 날'이라는 특수한 상황 덕분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월요일 아침이면 교실 밖에서 선뜻 들어오지 못한 채 핸드폰으로 엄마와 통화하며 울먹이던 아이도, 거의 매일 첫 수업 시각 9시를 넘겨 뒷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오는 아이도, 다방면으로 한해 가장 내 속을 까맣게 태우던 아이도 오늘은 다 듬직해 보인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심장이 아니라 아픈 곳'이라던 홍은전 작가의 말처럼, 학년 마지막 날에 이 아이들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해 내내 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기울였기 때문이리라.
학교 방송으로 교실에서 방학식을 진행하던 1교시에도, 통지표를 받고 성적과 진급반을 확인하며 일순 왁자해진 2교시에도 발랄하기만 했던 아이들이 다른 감정을 내 보인 건, 마지막 인사를 하고 교실을 떠날 때였다.
매년 마지막 날, 아이들과 헤어지는 순간에 행하는 나만의 통과 의례가 있다. 아이가 하이 파이브나 허그, 둘 중 하나를 택해 그 방식으로 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한 아이, 한 아이와 눈 맞추며 스킨십이 오가는 순간. 그때가 아이들과 내 진심이 오가는 순간이다.
올해는 남자아이 두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들 모두가 허그를 택했다. 작년보다 이것을 택한 아이들이 많다는 건 올해 아이들이 내게 더 많이 마음을 열었단 뜻일까. 두툼한 외투를 입어 눈사람처럼 푸근해진 아이들이 품 안으로 달려들면 곰인형을 안은 듯 따듯하다. 스킨십이 좀 약한 나이지만 오늘만큼은 아이들이 안겨오는 강도대로 꼭 품었다.
서로 자주 어울리던 남자아이들 몇은 개별로 안기는 게 어색했던지 "와!" 하며 우르르 내 품으로 몰려왔다. 갔다가 다시 돌아와 한 번 더 안고 가는 아이, 눈이 빨개져서 "선생님이랑 계속 있고 싶어요"하던 아이까지, 들썩이던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니 도떼기시장 같던 교실이 이내 휑해졌다.
조용해진 교실에 앉아 몇몇 아이들이 주고 간 편지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사랑과, 감사, 진급 학년의 각오 등 매년 비슷비슷한 내용의 아이들 편지 속에 정갈하게 쓰인 두 장짜리 편지가 섞여 있는 게 아닌가? 한 아이 어머니가 쓰신 편지였다. 학부모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아닌 손 편지를 받은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편지를 쓰며 어떤 표정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모녀가 각자의 자리에서 예쁜 편지지에 사각사각 편지를 쓰는 장면. 한없이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이가 건넨 사연에 울컥
'일 년 동안 감사했던 마음들을 담아두기만 했었는데 꼭 전해드리고 싶었다'며 어머니가 써 내려간 편지에는 3월 학부모 총회에서 만난 첫 만남 인상부터 학부모 상담, 개별 상담 등을 거치며 들었던 생각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꼼꼼히 담겨 있었다. 아이가 자리를 바꾼 후, "엄마, 나 오늘 발표하려고 손을 많이 들었어. 선생님 가까이에 앉으니까 왠지 자신감이 생겨!"라고 한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는 부분에서는 어찌나 마음이 뭉클해지던지...
편지 속 아이는 수줍음이 많아서 1학기 내내 자발적으로 손을 드는 일이 거의 없었다. 2학기 들어서고 어느 때부터인가 발표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이 아이가 이렇게나 발표를 잘했었나?' 착각이 들 정도로 의견 표현을 잘했다. 참 대견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너무 감사했다.
"유진(가명)이가 살면서 선생님과 같은 스승님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어머니의 이 문장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새해 계획을 따로 세우지 않는 나이지만 이 편지 덕분에 한 가지는 마음먹었다. '곁에 가까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기는 교사 되기'.
꼭 교사가 아니더라도 곁에 있을 때 왠지 자신감이 생기는 사람이라면 늘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겠는가. 내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친구들, 아낌없는 정을 나누는 지인들. 용기를 주는 사람들.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 내게도 그들의 향기가 묻어나는 게 아닐까.
포옹과 손 편지 덕분에 올해도 풍년 농사 지었다고, 종업식 날 잠시 우쭐해졌다. 덕분에 두 번째 새해 다짐이 생겼다. '감사한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기'. 마음에만 담고 있는 고마움은 상대에게 전해지기 어렵다. 나도 이번엔 내 아이들 담임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짧은 손 편지라도 써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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