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의 산재 피해자 공격이 도를 넘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이주환 의원이 '나일롱 환자'와 '산재 카르텔'을 언급하더니, 11월 대통령실은 전 정부의 고의적 방기로 "혈세가 줄줄 새고 있는 정황을 포착했다"고도 했다. 고용노동부도 덩달아 "산재 카르텔을 뿌리뽑기 위한 감사"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으면 한국의 산재보험제도는 나일롱 환자를 양산할 수 있을 정도로 문턱이 무척이나 낮으며, 산재로 인정받은 노동자들은 카르텔을 결성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수혜를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은 딴판이다. 산재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산재 제도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언론들은 정부와 여당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할 뿐 실제 산재 당사자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산재 피해자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만이 퍼져나가는 사이 나일롱 환자로 취급하고, '카르텔' 주범으로 몰아가는 말들에 당사자들은 크나큰 상처를 입고 있다.
이번 <일터>에서는 두 명의 산재 피해자를 만나 이들이 직접 경험한 산재보험제도의 실태 그리고 정부의 산재환자 공격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아픈데 취업을 할 수 있다뇨?"
- 삼성전자 LED 공정 산재 피해자 A씨
A씨는 201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LED 공정에서 근무했던 노동자이다. 2019년 삼성전자를 퇴사한 A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뇌에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결책을 수소문하다 반올림을 통해 노무사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 반올림의 도움으로 산재 신청을 진행해 약 1년 만에 산재로 인정받았고, 1년 8개월의 산재요양기간 휴업급여와 요양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치료에만 전념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산재요양 기간 만료를 앞두고 요양급여는 1년 연장이 승인되었지만 이후 신청한 휴업급여는 치료를 받는 날을 제외하고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이 A씨가 취업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수소문했지만, 이미 뇌종양이 척수로 퍼져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휴업급여 불승인 판정이 났을 때는 정말 막막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몸이 여전히 아픈데, 계속 일을 하라고 하니 무슨 일을 해야 살 수 있을까. 여전히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아픈데, 근로복지공단에서 왜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지 의아했어요."
다행히도 A씨는 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이의가 받아들여져 다시 이전처럼 전일 휴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후 산재요양기간을 다시 연장하는 과정에서 같은 문제가 재차 반복되었다. 이번에도 이의를 제기하여 전일 휴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A씨는 전일 휴업급여를 받기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앞으로 휴업급여를 신청할 때도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게 아닌지, 솔직히 너무 불안해요. 다행히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계속 반올림이나 노무사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내가 일을 할 수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요."
근로복지공단의 요양·휴업급여 심사가 지나치게 엄격하여, 심각한 산재 피해를 입은 노동자에게 산재 요양기간이나 휴업급여를 충분하게 책정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1월 21일, A씨를 비롯해 산재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 정부의 산재 당사자 공격을 규탄하는 긴급 증언대회 '나는 나일롱 환자가 아니다'에서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정경숙 부본부장은 급식 노동자의 사례를 중심으로 실태를 지적했다.
"폐암 1기 판정을 받은 급식 노동자가 산재 승인과 수술 뒤 3주의 요양 기간이 주어졌습니다. 여전히 일하는 동안 숨을 잘 쉴 수 없다고 하십니다. 폐암 4기 판정을 받은 급식 노동자도 휴가, 휴직을 다 사용하고도 회복하지 못해 퇴사를 한 상황입니다. 멀쩡한 몸으로도 하기 힘든 일을 회복 중인 사람이 견디면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너무 협소한 추정의 원칙, 노동자의 건강권을 가로막는다
- 금속노조 한국타이어지회 변우석 노안실장
금속노조 한국타이어지회 변우석 노안실장은 2019년, 몸에 큰 이상을 느꼈다. 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평소에도 어깨나 팔에 통증을 자주 느꼈지만, 팔꿈치 우측에 좀처럼 참기 어려운 통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노동조합에 이야기해 병원 치료를 병행하면서 산재 신청을 진행했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다.
"사고 산재는 일주일이면 처리가 끝나는데, 질병 산재는 그 당시만 해도 승인 여부가 나오기까지 100일이나 걸리더라고요. 준비해야 할 서류도 무척이나 많아 혼자 진행하기엔 무척 어려워 보였어요."
그때의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변우석 실장은 근골격계질환에 시달리는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산재 신청을 돕고 있다. 특히 이전까지는 공단 지침으로 존재하던 '근골격 계질병 추정의 원칙'(이하 추정의 원칙)이 2022년부터 고용노동부 고시로 법제화될 때는 조금이라도 처리 기간이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추정의 원칙이 처음 노동부 고시에 포함된다고 했을 때는 사정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같은 공장에서 같은 기간 동안 일을 해 같은 부위에 질환이 발생했는데도, 한 명은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서 신청할 수 있는데 다른 한 명은 고시에 현재 근무하는 직종이 없어 추정의 원칙을 적용할 수가 없었어요. 처리 기간도 올해는 8-9개월까지 늘어났어요."
변우석 실장은 산재 처리 기간이 갈수록 늘어나 단체협약에서 보장된 산재 휴직 기간을 초과할 지경에 이르자, 결국 산재 처리를 포기하는 노동자들이 점차 생기고 있음도 지적했다.
'나는 나일롱 환자가 아니다' 증언대회에 참여한 한국타이어지회 오동영 부지회장도 근골격계 산재 노동자들이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기 쉽지 않음을 꼬집었다.
"한국타이어 생산 현장의 모든 공정에서는 작업자들이 모든 신체부위를 활용해서 정형적인 작업은 물론 비정형적인 작업도 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일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 동안 하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기계도 오랫동안 사용하면 망가지고 고장이 나는데, 사람이 아프거나 질병에 걸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 까? 그런데도 고시에 등재된 추정의 원칙은 너무나도 협소합니다. 간신히 고시에서 규정된 추정의 원칙에 해당되어도 심사 단계에서 상병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병이 복합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재해발생경위서를 작성한 적도 있습니다. 추정의 원칙이 정작 재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는 상황을 하루 빨리 바꿔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본은 오히려 추정의 원칙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 연합회(경총)이 지난 8월 무분별한 산재 신청 유도와 산재 부정수급 문제 심화를 이유 로 추정의 원칙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근골격계 산재 노동자를 압박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와 여당도 사실상 이러한 의견에 동조하며, 근골격계 산재 노 동자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기도 전에 심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다.
정부는 노동자 겁박 중단하고, 산재 당사자 목소리 들어라
두 명의 산재 당사자 모두 정부와 여당의 산재 피해자 공격에 대해 많은 우려를 드러냈다.
A씨= "정말 자신처럼 아픈 환자"들만 산재로 인정받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정부의 발언에 크게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이 되어서야 이 발언이 담은 진의를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제가 몇 차례나 휴업급여를 못 받은 것도 어느 정도는 제가 일할 수 있는데 괜히 엄살을 부린다고 공단에서 판단을 한 거잖아요. 그제야 정부의 이 발언들이 저 같은 사람들도 나일롱 환자로 묶어서 보는 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변우석 실장은 정부의 발언으로 인해 자신을 비롯해 다른 산재 피해자들이 위축되는 것을 걱정했다.
"저도 수 차례 산재 경험이 있어요. 뉴스에서 처음 그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더라고요.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산재 제도를 잘 모르는데, 정부 발언만 믿고 산재 피해자들이 아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돈만 받는구나하고 생각할거 아니에요. 저도 그럴 정도인데, 다른 산재 피해자들이나 가족들은 더욱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정부의 이번 발언으로 상처를 입었을 같은 산재 피해자들에게 A씨는 "너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말자"고, 변우석 실장은 "정부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로서 산재 신청을 계속 이어나가자"고 전했다.
정부 역시도 산재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여 추정의 원칙은 더욱 확대하고, 고무줄처럼 제멋대로인 요양기간과 휴업급여 판단 기준을 정비하는 등 산재로 몸과 마음을 다친 노 동자들이 제대로 치료받고 원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산재 피해 노동자에 대한 겁박을 멈춰야만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성상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4년 1월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