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겪은 일이다. 급한 업무 때문에 서울 2호선 홍익대역 근처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나는 약속 전화를 끊자마자 염려스럽게 하늘부터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도 앱으로 확인해 보니 거리상으론, 홍대가 무척 가까웠으나 곧장 가는 버스 편이 없어 난감했다.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께 홍대 삼거리포차 쪽으로 가달라고 말씀드리고 거리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1킬로미터쯤 직진을 하다가 좌회전해서 또 1킬로미터쯤 직진하면 되는 초간단 코스였다. 그런데 택시가 갑자기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빙빙 돌기 시작한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홍대 인근 지리에 약하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사님, 왜 큰길로 안 가고 이 길로 가세요? 큰길로 가는 게 더 빠른 것 같은데요."
그랬더니 조금 전에 다른 손님을 태우고 그 길로 가 봤는데 엄청 막히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런가요.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빨리만 가 주세요."
나는 부탁조로 말을 해두고 마음을 놓으려는데, 기사님이 어디 사느냐고 묻는다. 찜찜했지만, 대충 ○○동 산다고 대답하니까 기사님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거기 살면 홍대 자주 오겠네. 밤에 놀고 싶으면 홍대로 나오죠? 그죠? 홍대에 놀 데 많잖아요."
말끝에서 웃음기가 보이기에 나도 웃으며 "일 때문에만 몇 번 와 봤어요"라고 대답하는데, 기사님의 말투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영 찜찜한 택시기사의 질문
"홍대 가면 뻔한 거지. 술 왕창 마시고 클럽 가서 밤새 놀고... 뭐, 다 그런 거잖아요. 아니에요? 지금도 놀러 가는 거죠?"
'밤새 놀고'와 '뭐, 다 그런 거잖아요' 그 두 마디 사이의 공백이 영 찜찜하다. 뭔가 생략된 말이 있는 것만 같아 대꾸하기가 싫어졌다. 빨리 이 택시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지뢰밭처럼 신호등이 쫙 깔린 이차선 도로에 하역작업하는 트럭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미 거리상으론 도착하고도 남았을 거리를 온 것 같은데, 왜인지 택시는 더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표지판이 없어서 점포 간판에 적힌 주소를 보니 엉뚱한 동네 이름이 보인다. 갑자기 두려움이 등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때마침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약속 장소에 벌써 도착했다고 한다. 나는 재빨리 기사에게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가 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내 딴에는 강하게 말했는데 통하지 않는다.
"무슨 약속?"
빙글빙글 웃으며 기사가 한 말이었다.
한 번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하니까 계속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자기가 판단하기에 안 중요한 약속이면 좀 더 돌아가겠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짜증이 나는 걸 꾹 참고 "일 때문에요."라고 또박또박 말한다.
그런데 기사는 이제 소리까지 내며 웃는다.
"하하, 홍대에서 무슨 일? 직업이 뭐길래...."
나는 더 이상 대꾸할 가치를 못 느끼고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차에서 뛰어내릴 궁리를 시작했다. 다행히 코너를 돌자마자 내가 와본 적 있는 골목이 나왔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슬금슬금 전진하는 택시.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세워달라니까요!"
내려달라고 해도 운행 멈추지 않는 기사... 결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기사는 차를 멈추지 않고 모퉁이를 돌려고 한다. 그 모퉁이를 돌면 쌩쌩 달릴 수 있는 넓은 대로가 나온다. 순간 기사가 나를 어디까지 제멋대로 끌고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몹시 겁이 났다.
다행히 바로 앞에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무더기로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내려야 한다는 판단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안 내려주면 지금 문을 열고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택시 기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기사는 내가 내미는 카드를 받았다. 내가 택시비 결제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몇 초 동안 그는 그렇게 새된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구시렁거린다.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택시 기사를 바라봤다. 그동안 그의 택시에선 나처럼 빨리 탈출하고 싶은 사람들이 꽤나 많았던 게 아닐까.
그렇게 간신히 택시에서 탈출해 약속 장소까지 진눈깨비를 맞으며 뛰어갔다. 예상보다 더 낸 택시비가 아까워 쓴웃음이 나는 한편으로, 세상 참 무섭다는 생각에 뒤늦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더 갔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었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그에게서 느껴진 불쾌함의 근원엔 무엇이 있는 걸까, 그 택시 기사는 세상을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타락한 곳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상식'이 뿌리내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저녁 시간에 홍대 가자는 손님 = 문란하게 노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유흥가 근처에 산다고 다 술 마시러 가는 건 아닌데
약속 시간에 늦은 데 대한 사과를 하면서 지인에게 택시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더니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지인의 집과 사무실이 홍대 인근이라 늦게 퇴근하는 날 종종 비슷한 오해를 받는다고 말했다. 성별이 다른 직원과 야근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가거나 택시에 동승하면, 유흥을 즐기다 만난 애인 사이로 오해를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그런 시선들 때문에 지인은 고교생인 딸에게 택시를 이용해 밤늦게 귀가할 일이 생기면, 절대 유흥가를 기점으로 집의 위치를 설명하지 말도록 주의시킨 적도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중요하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세상은 한없이 친절한 곳이 될 수도, 한없이 골치 아픈 곳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을 편향된 상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택시 기사의 주변에서는 아마 내일도 모레도 오늘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는 홍대에 볼일이 있어 가려는 손님들에게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다가 목적지에 다 가지도 않았는데 '차 세우라'는 소리를 또다시 듣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세상엔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편향된 상식으로 인해 조금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서 말이다.
이건 비단 그 기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도 그처럼 어떤 불합리한 상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혼자만 까맣게 모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실이 혹시 불합리한 편견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