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엄마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삶의 서사를 들으며 내가 가보지 못한 시대를 경험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어린 엄마를 만날 수 있었기에. 그 이야기 속에는 행복과 슬픔, 그리움과 아쉬움이 있었고 그 감정들을 공유하며 엄마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설 <밝은 밤>은 내게 친숙하게 다가왔다.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로 이어지는 녹진한 삶의 스토리가 중심축을 이루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화자인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상처받고 서울에서 희령으로 도망치듯 떠난다. 희령은 열 살 이후로 한 번도 찾지 않은 엄마의 고향이었다. 거기서 어느 날 한 할머니를 만난다.
"아가씨, 내 손녀랑 닮았어. 그 애를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보고 못 봤어. 내 딸의 딸인데."
할머니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손녀 이름이 지연이예요, 이지연. 딸 이름은 길미선."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할머니는 나와 우리 엄마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중략)
우리는 언덕 위에 어색하게 서서 서로를 바라봤다. 할머니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는데, 나는 할머니가 처음부터 나를 알아봤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내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야."(20p-21p)
글자 위로 겹쳐진 할머니의 모습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할머니가 서른둘이 된 지연의 앞에 다시 나타났고 이후 만남을 거듭하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러다 할머니가 건넨 사진 속의 여인-지연과 꼭 닮은 증조모- 을 보고 호기심을 보이는 지연에게 할머니는 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증조할머니 이정선은 일제 강점기에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다 위안부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긴 증조부의 청혼으로 개성으로 도피하여 신혼살림을 차리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한순간의 치기로 부모님이 반대한 결혼을 강행한 증조부는 두고두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아내를 원망한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60p- 61p)
남편과 주변 사람들의 박대를 받으며 살아가던 증조모의 삶에 위안이 된 건 남편 친구의 아내인 새비와의 우정이었다. 태어난 고장의 이름을 따 삼천과 새비로 불리던 두 여성은 암울한 시기를 서로 의지하고 다독이며 버텨낸다.
그러다 딸인 영옥(지연의 할머니)이 태어나지만 백정의 딸인 어머니로 인해 차별받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성장하면서 상처는 대물림된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정 없는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의 삶은 한층 힘겨워진다. 아내가 있으면서 자신과 중혼한 뻔뻔한 남편 대신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며 홀로 딸(미선)을 키웠지만 딸은 성장하자마자 집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다.
그런 딸이 다시 딸(지연)을 낳으면서 새로운 상처가 생겨난다. 정상적인 가정을 간절히 바랐던 엄마 미선은 시가 식구들의 부당한 처사를 묵묵히 견뎠고, 자신의 딸에게도 같은 태도를 강요한다. 거기다 어린 시절 언니의 죽음으로 알맹이 없는 빈 껍질같이 변해버린 엄마 밑에서 외롭게 성장하면서 사랑과 인정에 목말랐던 지연에게 남편은 그 누구보다 큰 상처를 주고 떠나버린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 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252p)
슬픔을 안고 삶을 버텨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스레 나와 엄마, 할머니를 떠올리게 되었다. 1남 4녀를 두신 할머니는 아들을 끔찍이 아끼신 반면 딸들에게는 별 애정을 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차별이 깊은 상처로 남은 상태에서 둘째 딸임에도 맏이이자 아들 노릇을 했던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할머니를 챙기시면서도 이따금 분노와 원망을 쏟아놓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그저 묵묵히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글자 위로 겹쳤다.
언젠가 이모와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OO이가 뚝성질이 있어서 그렇지 속이 깊고 착해."
엄마에 대한 속정을 그렇게 표현하셨다던 할머니. 묻어두지 않고 밖으로 드러내어 표현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많이 우셨다. 시간이 꽤 지난 요즘도 생전의 모습이 생각나신다며 가끔 눈물을 글썽이신다. 엄마를 숨 막히게 했던 가슴의 응어리가 이젠 많이 녹아 없어진 걸까. 얼마 전부터 나와 동생들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애정 표현에 서툴던,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분이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신다.
"우리 딸 사랑해."
처음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엄마의 음성을 들었을 땐 놀라서 어버버하며 제대로 대꾸도 못했던 내가('네, 들어가세요'라고 했었지 아마.) 요즘은 먼저 말을 건네고 있다.
"엄마아빠, 사랑해요."
입 밖에 꺼내기까지 참 힘들었지만 몇 번 말하고 나니 이제는 익숙해졌다. 한때 마음속에 자리하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거의 사라지고 평온함이 찾아왔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과거의 부모님 나이가 되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비로소 두 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자신과의 화해
지연의 엄마인 미선도 애써 외면해 오던 과거를 직시하면서 상처투성이인 순간들 속에도 자신을 붙잡아주던 속삭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괴롭힘 당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면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해변에 가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증조모는 엄마를 찾아냈다. 어두워지는 해변에서 미선아, 미선아, 부르며 걸어오던 증조모의 모습을 엄마는 기억했다. 그때 자신이 느꼈던 반가움을, 자신을 짓누르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무엇보다도 '내게 누군가가 있다'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엄마는 기억했다. 어른이 되고 증조모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 속삭임은 사라지지 않고 엄마 안에 남아 있었다. (329p-330p)
미선의 꿈에 나온 증조모는 한밤중에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고향집 지붕에 앉아 있었다. '할머닌 내가 미워?'라고 묻는 손녀에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꿈에서 깨어나 미처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이제 그만 손녀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다정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 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337p)
미선이 과거를 대면하고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지연도 지난날의 자신과 화해하며 조금씩 일상을 회복해 간다.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인물들을 보며 지난날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스스로에게 모진 말을 퍼붓던 나. 누구보다 아껴주어야 할 자신에게 내가... 그랬구나.
요즘은 '과거의 나'에 시간이 한 겹 한 겹 더해져 현재의 내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아팠던 그 시간들이 내 안에 녹아들어 나를 성장시킨 것처럼 다가올 시간들 속에서 나는 또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겠지.
산다는 건 자신을 믿고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인생의 어두운 시기를 통과하는 이가 있다면 먼저 자신과 화해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용기를 내어 건넨 손을 잡고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환한 달빛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 함께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