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최근 민생으로 급선회하더니, 마치 붕어빵 찍어내듯이 맥락 없는 대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전가의 보도인 건전재정 기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스템 밖에서 급조된 이것저것들이 민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이는 과도한 정치도 이념도 아닌 극단의 포플리즘에 불과하다.
돈 풀면 물가 때문에 서민이 다 죽는다고 하더니 이제는 3조 원의 세수 충격을 감수하면서 중소상공인 세금 납부 유예 조치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서민을 위한 부자 감세라며 주식양도세와 금투세를 폐기하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직권으로 세금 납부를 유예하겠다고 한다. 건전재정은커녕 세수 펑크 충격에 곳간이 거덜 날 판이다.
더 큰 문제는 설익은 졸속 대책들이 난무하는 사이, 경제 운영 시스템은 망가지고 민생경제는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위기의 본질을 관통하는 근본 대책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민생 경제는 금융위기에 준하는 비상 경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졸속 민생대책과 함께 사라진 건전재정 기조
최근 정부가 발표한 중소소상공인에 대한 부과세 납부 유예 조치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졸속 대책이다. 골자는 903만 명의 부가세 대상자 중에서 128만 명을 직권으로 추려서 두 달간 납부를 연장해 주고, 나머지 700여 만 명도 납부 유예를 신청하면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전체 사업장을 대상으로 세금 납부를 유예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부가세 납부를 총선 직전까지 연장해 주겠다는 것인데 엄밀히 따지면 4월 총선을 겨냥한 조삼모사 대책에 불과하다.
이처럼 국정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저품질 대책이 확대·재생산 되다 보면, 품질관리 시스템이 망가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논리도 절차도 없는 부가세 납부 유예 조치가 여기에 속한다.
건전재정 기조는 윤석열 정부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여겨져 왔다. 정부의 긴축 재정이 유독 중산층과 서민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민생경제는 기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통을 감내해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하기만 했다. 철 지난 시장주의 이념에 굴절된 건전재정은 부자 확대 재정·민생 긴축 재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법인세 인하, 주식양도세 및 금투세 폐지 등 친기업·친자본 편향이 역대급 세수 펑크라는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가 건전재정을 강조할수록 나라 곳간이 거덜 나고 민생 경제가 총체적 난국에 직면하게 되는 이유다.
3조 원 안팎의 세수 변동이 예상되는 세금 납부 유예 조치 역시 윤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재정 운영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세수 펑크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대책은 윤 정부가 사실상 건전재정 기조를 폐기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다. 이를 계기로 정부가 이와 유사한 졸속 대책들을 남발하게 되면, 재정 운영 시스템이 망가지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맥락 없이 재정과 밀접한 세금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결코 민생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총선용 저품질 민생 대책 남발
대통령 주재 민생토론회 등 시스템 밖에서 제기되는 졸속 아이디어들이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민생 대책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번 부가세 납부 유예 조치 역시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민생토론회에서 국세청장이 세정 지원 방안을 발표했는데, 정부가 이를 받아 전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제는 하다 하다 국세청장까지 민생 마케팅에 끼어들어 스스로 세정 질서를 어지럽히는 데 일조하고 있다. 어차피 민생토론회 자체가 총선용 대책을 찍어내는 수단인 만큼 정책 품질을 담보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번 부가세 납부 유예 조치를 보면 윤 정부 정책 품질 관리 프로세스에 하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골자는 900만 명의 중소상공인 중에서 수요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128만 명을 일방적으로 선별해 지원하고, 나머지 사업장도 원하면 납부를 유예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전적 수요 분석이나 정책 숙의 절차도 없고, 실제 정책 수요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할 길이 없다.
더욱이 납부 유예에 따른 효과성이나 실효성이 검증된 대책인지도 알 길이 없다. 정책의 시급성·효과성·실효성 등을 검증하는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처럼 설익은 대책을 내놓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가세 납부 유예 조치가 도움이 절실한 정책 수요자를 선별 타격하지 못하고 '줄 테니 그냥 받아라' 식의 충동적 대책에 불과한 이유다.
위기의 본질에서 벗어난 부실 대책은 주로 '경제 위에 정치'가 군림하는 시기에 빈번하게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중소상공인을 위해 세금 납부를 두 달간 연장해 주고 두 달 후에 다시 걷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조삼모사 대책은 더 큰 위기를 부를 부실 대책일 뿐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부실 대책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코로나 사태 때 정부가 5차례에 걸쳐 3년간 연장한 만기 연장·이자 유예 조치가 여기에 속한다. 한 달 이자도 못 내는 자영업자·소상공인에게 3년 치 밀린 이자를 몇 번 쪼개줄 테니 몰아서 내라 하면, 그냥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가 팬데믹 이자 폭리 문제로 역풍을 맞자, 금융기관의 팔을 비틀어 '상생금융 패키지' 대책을 급조한 바 있다. 이게 부실 대책인 이유는 본질인 금리 구조에 접근하지 못하고 선별로 일부를 지원하는 미봉책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금융기관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세금유예 조치 역시 오늘의 고통을 내일로 미루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 내용을 보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불량할 뿐만 아니라 총선에 맞춰진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번 조치가 워낙 파격적이고 즉흥적이라 당장은 달콤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시차를 두고 민생고를 누적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위기의 본질을 관통하는 근본 대책 시급
민생경제는 아직도 코로나발 경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전의 균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된 민생 대책은 자영업자·소상공인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관통하는 근본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윤 정부의 부가세 납부 유예가 민생경제 과녁을 빗나간 화살인 이유다.
위기의 본질은 고물가·고금리 충격과 복원력을 상실한 매출 충격이다. 자영업자·소상공인은 코로나 국면에서 대출로 임대료를 돌려막는 사이 코로나 대출이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그 사이 3%짜리 은행 대출금리는 2배 이상 급등해 6~7%대까지 상승하며 부채발 민생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자영업자 대출뿐만 아니라 가계대출 역시 추가 대출이 추가 부실을 부르는 부채 함정에 빠진 상태다. 자영업자대출을 포함한 실질 가계부채(개인사업자대출 + 가계부채)는 2019년 2049조 원에서 2023년 3분기 2573조 원으로 늘어났다. 2019년 이후 발생한 코로나 부채만 무려 524조 원에 달한다.
특히 자영업자·소상공인은 매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부채 충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위기의 본질이 부채발 민생대란에 있다면 정부는 당연히 민생 부채 대책과 매출 증대 대책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는 민생 대책은 본질에서 벗어난 곁가지이거나 문제의 원천에 접근하지 못하는 미봉책들이 대부분이다. 세금 납부 유예 조치도 그렇고, 만기 연장 및 이자유예 조치나 고육책에 가까운 금융기관 상생금융 패키지도 그렇다.
매출 충격에 노출된 자영업자·소상공인은 매출이 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인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정부가 내수업종의 매출 증대를 위해 제대로 된 내수진작책을 내놓은 기억이 없다. 소비진작책은커녕 멀쩡한 지역화폐 정책도 매년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고물가 충격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대책이라고 해 봤자 무리한 공공 요금인상으로 전 국민에게 고물가 충격을 가한 후, 일부 취약계층만 선별로 구제하는 조치가 전부다. 보편으로 충격을 가하고 선별로 구제하는 뺄셈 대책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민생 부채 대응은 더욱 심각하다. 금융기관들이 코로나 사태에 힘입어 매년 50조원이상의 팬데믹 이자 폭리를 취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정부와 금융기관이 내놓은 상생 금융 패키지 역시 보편 충격을 선별로 지원했던 지난 난방비 사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의 원천인 대출 금리의 금융 안정 기능을 보완하지 않는 한, 어떠한 금융 조치도 대책이 될 수 없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준금리 충격을 가산금리와 우대금리를 통해 흡수할 수 있는 금리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민생 확장 재정 추진할 때
민생경제는 금융위기에 준하는 비상 경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금은 민생위기 극복을 위해 특단에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고, 확장적 민생재정으로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고금리 충격에 노출된 가계부채 경착륙 위험, 주택가격 충격에 노출된 부동산 PF 사태, 물가 충격에 노출된 중산층과 서민, 매출 충격에 취약한 자영업자·소상공인 등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지난해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제안했던 '35조 민생 회복 추경안'에는 위기의 본질에 접근하는 여러 대책이 담겨있다. 그러나 건전재정을 놓고 여야가 갑론을박하는 사이 민생 위기를 조기에 진화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이제는 이 대표의 추경안으로도 부채발 민생위기를 막아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 실기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총체적 난국에 직면할 수 있다. 윤 정부는 민생대란이 발현하기 전에 위기의 원천을 타격하는 민생 재정 처방전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