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1시 30분경, 덤덤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울 서초동 법원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이날 저는 민변 사무실에 있다가 2시 10분에 예정된 선고 결과가 나오면
성명서를 만들어 3시경 법원 앞에서 열기로 한 기자회견장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법원 앞에서는 환경운동연합 강홍구 활동가, 환경보건시민센터 김영환 연구위원이 피해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무죄, 부분유죄, 유죄 등 3가지 판결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기자회견문 초안을 참여연대 장동엽 활동가가 미리 마련했습니다. 2시 15분경 법정에 들어간 강홍구 활동가가 선고 내용을 듣고 구글 공동문서에 실시간으로 올린 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충격적인 1심 무죄 선고... 2심은 달랐다
"어, 가습기 재판 유죄나오겠는데요!"
성명서 인쇄를 도와주기로 한 민변 서채완 변호사가 소리쳤습니다.
"아직 일러요. 판결이란 게 서두랑 선고 결과가 다른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매우 신중했습니다. 실은 기대를 했다가 허망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해서 제 머릿속에는 2심 무죄를 예상해 성명서 제목으로 '대한민국 사법부는 죽었다'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심에서 유죄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1심 무죄 선고가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일까요?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지난 3년간의 시간들이 머릿속에 흘러갔습니다.
▲ 2심 재판부의 진행흐름과 재판장의 사건에 대한 발언이 1심과 크게 다르고,
▲ 1심에서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이 나온 검찰도 심기일전해 수사검사를 투입하고 1심 판결을 10대 잘못이라며 조목조목 비판했고,
▲ 국립환경과학원도 새로운 증거를 재판부에 제출해 왔고,
▲ 여러 전문가들이 재판정에서 피고변호사들과 논쟁하며 독성과 역학조사 결과를 강조했고,
▲ 환경단체들은 3년간 거의 매주매달마다 유죄 촉구 캠페인을 진행했고,
▲ 3차례 넘게 전국순회캠페인과 피해자 지역 모임을 가졌고,
▲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재판모니터링을 하고 탄원서를 제출했고,
▲ 전국 수십여 지역에서 환경사회단체들이 매달 공동캠페인을 진행했고,
▲ 7개 전문학술단체 전문가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가졌고,
▲ 2023년 하반기에는 곳곳에서 피해자단체들이 탄원서를 재판부에 보내는 활동을 했고,
▲ 마지막 2주 동안엔 10여 명의 전문가들이 유죄를 촉구하는 언론기고 활동을 통해 여론의 관심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20분여 시간이 흐르고 2시 40분경 "원심 파기"라는 강홍구 활동가의 타이핑이 올라왔습니다. 이어서 "홍지호 금고 3년(실제로는 4년) 등등" 글이 이어졌습니다.
"아, 유죄다 유죄야!"
재판장의 모두 발언은 미사여구가 아니었고 유죄판단의 배경이었습니다.
"장기간 전 국민을 상대로 만성흡입독성을 일으킨 사건으로 제품 출시 전에 요구되는 안전성 검사를 수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하지않아 피해를 확대시켰고 (…) 중첩적 순차적 경합 결과 피해자들이 천식, 사망 등 피해를 크게 일으켰다.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거듭 호소했다. 피해 원인 규명과정에서 많은 국가, 사회적 자원이 소요되었고, 아직도 피해 해결이 되지 않았다(…)"
재판부가 말한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갖고 있는 시각이지만 1심 재판부와 확연히 다른 시각이었습니다.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며 이유로 든 쟁점 하나하나를 언급하며 모두 부정하거나 전혀 다르게 판단했습니다. cmit/mit 살균성분이 폐에 도달했고, 여러 폐질환 질병을 일으켰다, 역학적 상관관계도 확인되었다, 피해자들의 제품사용노출기록도 인정한다, 전문가들이 제출한 증거도 인정된다 등등입니다.
1심 재판부의 무죄 판단을 모두 뒤집었고 한발 더 나아가 '온국민을 대상으로 흡입독성 실험을 한거다'라고 규정했습니다. 피해자나 환경운동가가 거리캠페인에서 소리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2심 재판부도 국민들과 같은 안타까움으로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지켜보고 느꼈다는 것이 판결문 속에 고스란히 담겨서 낭독되었던 것입니다.
'유죄'는 받아냈지만... 피해자의 항의 "고작 금고 4년이냐"
저는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별 기자회견문 초안을 제쳐놓고 "원심을 파기한다"로 시작되는 간결한 성명서를 작성했습니다. cmit/mit 제품이 언제 얼마나 많이 팔렸고 그 제품 사용피해자가 얼마나 많은지 강조했습니다.
"이번 재판에서 문제가 된 cmit/mit살균성분의 가습기살균제 제품은 모두 8개이고 이 제품들을 사용했다가 건강피해를 입거나 사망한 소비자 중 2312명이 피해구제법에 의거 피해자로 인정된 상태다. 이는 전체 피해구제법 인정자 5667명의 41%다."
2011년 8월 31일 '제품명을 공개하고 피해신고를 받아라'는 제목의 가습기살균제 투쟁 13년으로 이어진 저의 첫 성명서 작성 이후 수백 번 작성해 온 일이었습니다.
인쇄된 성명서를 들고 법원 앞으로 뛰어가니 많은 기자들 앞에서 피해자들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성명서를 기자들에게 배포하고 마지막 순서에서 성명서 뒷부분을 제가 읽었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피해자 두 분, 류이 다큐 감독 등과 인근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자리를 가졌습니다.
"홍지호 표정봤어? 완전히 구겨졌더라구"
SK 홍지호(SK케미컬 전 대표), 애경 안용찬(애경산업 전 대표) 등 금고 4년 실형을 받고 겨우 법정구속을 피해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피고들을 발견해, 한마디 해보라며 가로막으며 항의한 김태종, 이장수 두 피해자와 류 감독의 거센 항의 장면이 인터넷 기사에 떴습니다.
"1800명이 죽었는데 고작 금고 몇년이냐."
법원 복도에서 소리 지른 김태종 피해자의 항의가 모든 피해자의 마음을 대변했고 피고들도 들었을거라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저는 그제야 찬찬히 언론기사들을 훑어봤습니다.
"오잉? 3년이 아니고 4년이었어?"
강홍구 활동가가 재판정에서 정신없이 타이핑을 하다 금고 4년형을 3년형으로 잘못 들었나 봅니다.
"구형량이 5년인데 4년이면 80% 수준이네! 3년형과 4년형의 차이는 크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서 빨리 판결문을 받아 보고 싶었습니다.
1심 때는 기대를 모은 첫 재판장이 피고측 변호인단의 회피로 중간에 바뀌었는데 결과는 무죄였고, 2심 때는 '추가 증거채택은 없다'고 해서 암울했던 첫 재판장이 중간에 바뀌었는데 결과는 유죄였습니다.
"여기요, 소주 한 병 주세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최예용씨는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자 환경보건학 박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