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는 차량 구매 비용이 상상초월 할 정도로 비싼 나라다. 싱가포르 정부가 교통체증, 환경문제 등을 관리하기 위해 자국 내 자동차 수요를 제어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차량을 구매하려면 우선 COE라는 차량취득권리증을 소지해야 한다. COE는 한 달에 2번 열리는 경매를 통해 취득할 수 있는데 그 금액이 어마어마하다.
2023년도 10년 만기 COE 최고가는 1600cc 이하 소형 자가용의 경우 10만 6000달러(싱가포르 달러/원 환율 약 980원, 약 1억 300만 원), 1600cc 이상 중대형 자가용의 경우 15만 달러(약 1억 4700만 원)였다(참고: COE Bidding Results 2020-2024, Singapore LTA). 10년 후 COE가 만료되면 차주는 갱신 시점의 COE를 다시 취득해야 차량을 운행할 수 있다.
COE에는 자동차 가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동차 가격도 한국과 비교하면 훨씬 비싸다. 2023년 10월 기아 뉴 쎄라토 세단 가격이 146,000달러(약 1억 4300만 원)였다(출처:
As COE premiums set new highs, should I renew my existing certificate or buy a used car?, The Straits Times, 2023. 10.7.). 싱가포르에서 자가용 한 대를 소유하고 운행하기 위해서는 COE, 자동차 가격, 차량등록 수수료, 자동차보험, 도로세, 기타 수수료 등 굉장히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마음에 쏙 든 자동차
우리 가족은 2005년에 싱가포르에 이사를 왔다. 싱가포르에 이사 오기 전에는 자동차 가격이 이렇게 비싼 줄 몰랐다. 아니, 상상도 못 했다. 이삿짐으로 부친 아이들 카시트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어린아이들이 있었지만 자가용을 구매하지 못했다. 다행히 대중교통 시스템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차가 없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특히 버스를 이용할 때 기사님들이 아이들이 안전하게 승하차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 감사했다.
자가용 구매를 결심한 건 2008년 11월에 싱가포르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 신문에 난 기사를 읽은 후였다. 1600cc 이하 소형 자가용의 COE가 10,455달러(당시 싱가포르 달러/원 환율 약 920원, 약 960만 원)에서 역대 최저인 2달러(약 1800원)로 급락했다고 나와 있었다. COE가격이 2달러라니, 국수 한 그릇 값보다도 싸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금융 위기로 인해 새 차량의 수요가 급감했고, 은행 및 금융기관에서 차량 대출을 받기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윳돈이 있다면 지금이 자가용을 구매할 적절한 시기라는 기사를 신문 사설에서 읽었다(출처:
At a glance: COE Prices over the past 10 years, The Straits Times, 2013.3.27.).
이때를 놓치면 앞으로 자가용을 구매하기가 많이 어려울 것 같았다. 한 달 사이에 COE는 다시 2000달러(약 180만 원)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남편과 상의 끝에 2009년 1월에 일본산 닛산 소형차를 샀다. 결혼 후 신차를 구매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골든 베이지 색의 자가용이 마음에 꼭 들었다. 소형차였지만 실내 공간이 넓어 활용도가 높았다. 자동차 핸들은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와이퍼, 라이터, 방향지시등도 한국 자동차와 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차량이 좌측통행을 하기 때문이다. 4년 만에 하는 운전인 데다가 통행방향이 달라서 정신을 바짝 차려 운전해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우측 차선을 이용할까 봐 운전을 할 때면 항상 오른쪽 어깨는 중앙선과 나란히 해야 한다고 되뇌었다.
자가용이 있으니 좋은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버스로 이동할 때와 달리 차 안에서 잠든 아이들을 다그쳐 깨우지 않아도 됐다. 시간을 아껴 쓸 수 있었다. 아이들이 태권도 수업을 받는 동안 나는 장을 보고 이후에 같이 집에 오면 됐다. 대중교통으로 가기 불편했던 동물원이나 사이언스 센터에도 연간회원권을 끊어 자주 다닐 수 있었다. 학교에 일하러 갈 때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됐다. 남편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 자가용을 정말 아끼고 사랑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작은 보냉 가방에 간단한 간식거리와 딸기우유를 넣어 다녔다. 아이들은 차 안에서 엄마가 만들어 준 도시락이 최고라고 재잘대며 참 맛있게도 먹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차 안에서 캐럴을 들으면서 오차드로드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했다. 가끔 아이들이 서로 장난치다가 울기도 했지만 차 안에서 우리 가족은 행복하고 즐거웠다.
10년이 흘러 2018년 12월에 COE가 만료되었다. 고민 끝에 5년 만기 COE로 갱신했다. 차량을 정기적으로 점검한 덕분에 차 상태는 괜찮았지만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할 부분이 계속 생겼다. 10년 만기 COE로 갱신하면 자동차 연식이 20년이 될 때까지 사용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차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한국에 비해 수리비가 턱없이 비싸서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2023년 12월에 COE가 최종적으로 만료되었다. 싱가포르 육상교통청 LTA에서 2023년 12월 말까지 폐차하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자가용 상태가 크게 나쁘지 않아 조금 손을 보면 앞으로 5년은 더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갱신할 수 없었다. 5년 만기 COE는 갱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폐차하는 수밖에 없었다.
LTA 웹사이트에서 폐차 과정을 알아보았다. LTA에 온라인으로 차량등록해제를 하면 관련된 정보가 LTA 시스템에 업데이트된다. 차량 폐차와 관련된 모든 절차와 환급이 자동으로 처리된다. 미납된 도로세나 기타 수수료가 있으면 지불하고, COE가 만료되지 않았는데 폐차할 경우에는 환급 신청을 한다. 폐차장에 차량을 운반해서 차량 실물 평가를 받는다. 최종적인 폐차 가격은 차량의 상태 및 부품 가치 등을 평가하여 책정된다. 마지막으로 차량이 폐차 처리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15년 동안 탄 정들었던 자가용을 폐차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가슴이 먹먹했다.내키지 않았지만, 폐차장에 차를 가져갈 날짜를 정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이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태워 준 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차체를 쓰다듬어 주었다. 폐차장에 가기 전날 남편은 차를 깨끗하게 닦았다. 아이들과 함께 차 옆에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남겼다. 억지웃음을 짓고 마음으로 울었다. 남편은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에게 "잘 자라"라고 인사를 하며 쓰다듬어 주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지나올 때면 아직도 폐차한 우리 자가용이 생각난다. 늘 그 자리에 세워 뒀던 차는 이제 없다. 노후 차량에서 나오는 미세 먼지를 줄여 환경에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래 본다. 2024년 1월 COE 첫 번째 경매에서 가격이 20% 하락했지만 앞으로의 추세를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싱가포르에서 또다시 자가용을 살 지는 물음표로 남겨 두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