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의 제철 음식을 맛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계절마다 다양한 야채, 어패류, 과일 등을 먹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싱가포르에서는 그런 한국의 제철 음식을 손쉽게 찾을 수 없어서 아쉽게 느껴진다.
싱가포르의 몇몇 한인 슈퍼마켓에서는 한국의 제철 야채를 수입해 판매하는데 입고되는 즉시 품절 되는 경우가 많다. 김장철에는 한국 배추나 무를 예약 주문을 받아 판매하고, 봄에는 냉이와 달래를 수입해 팔기도 한다.
필요한 식재료를 주문하려고 온라인 슈퍼마켓에 로그인하면 제철 야채가 입고되었다는 알림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인기 있는 제철 야채는 일찍 품절돼서 구매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조금만 일찍 알림을 확인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요즘 나는 예전만큼 온라인 한인 슈퍼마켓을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 올해 들어 물건값이 상당히 올랐기 때문이다. 몇 개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결제 금액이 작년보다 많이 나와서 대부분의 식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현지 슈퍼마켓에서 구입하고 있다. 꼭 필요한 한식 식재료는 집 근처 한인 슈퍼마켓에 직접 가서 구매한다. 주로 공산품 위주로 판매하지만 콩나물이나 깻잎과 같은 간단한 야채 몇 종류도 구비해 놓는 편이다.
며칠 전 냉동 임연수를 사러 집 근처 한인 슈퍼마켓에 갔다. 냉동고에서 임연수 3팩을 꺼냈다. 임연수는 인기가 있어서 재고가 있을 때 몇 팩씩 사놓는다. 비빔국수를 만들 때 필요한 소면 한 봉지도 담았다. 냉장 코너로 가서 혹시 살 만한 야채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반갑게도 냉이, 달래, 취나물, 아욱, 얼갈이와 같은 야채류가 조금씩 있었다. 하지만 야채가 별로 싱싱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한국산 배추는 상태가 괜찮아 보였지만 가격이 꽤 비쌌다. 배추 한 포기에 17달러(약 17,000원)로, 혼자 먹기에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냉장고 한쪽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납작하고 동그랗게 생긴 야채가 눈에 띄었다. 바로 봄동이었다! '아, 지금 봄동이 나오는 시기구나!' 진열대에는 봄동 2봉지가 남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봄동 2봉지를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하기 전에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봄동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하나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누렇게 말라 있는 잎이 좀 많았다. 한 봉지만 사도 혼자 서너 번 먹을 만큼 양은 충분해 보였다. 6.30달러(약 6,300원)를 주고 봄동 한 봉지만 사 왔다.
봄동 겉절이를 해 먹을 생각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간혹 한국에 계신 어머님이 출장 간 남편 편에 봄동 겉절이를 보내 주셔서 맛을 볼 수 있었지만, 내 손으로 봄동을 구매해서 요리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해외에 사느라 봄동을 살 기회가 없었다.
어머님표 봄동 겉절이 맛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맛을 내는 건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봄동을 소금에 절여야 할지 절이지 않아도 될지 몰라서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보았다. 소금에 절이지 않아도 된다고 나와 있었다. 레시피를 보니 대략 상추 겉절이처럼 만들면 될 것 같았다.
둥근 쟁반처럼 생긴 배추가 신기했다. 잎을 하나씩 뗐다. 초록색 겉잎에는 드문드문 누렇게 마른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 더 떼냈다. 아무리 잘 포장해 놓아도 수입되어 판매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잎이 조금씩 마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싱싱한 잎은 흐르는 물에 한 잎씩 깨끗이 씻어서 채반에 펼쳐 두었다. 잎을 다 씻어 놓으니 생각보다 양이 많아 보였다. 혼자 먹으려면 며칠을 두고 먹을 텐데 물기를 좀 제거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씻어 놓은 봄동을 야채 탈수기에 넣고 대충 물기를 제거했다. 물기를 제거한 봄동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대파도 썰어 놓았다.
다음으로 양념을 만들었다. 인터넷에 다양한 레시피가 있었지만 대략 들어가는 재료만 확인하고 내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 그릇에 고춧가루 3T, 까나리액젓 3T, 다진 마늘 1T, 매실액 1T, 설탕 1T를 잘 섞어 놓았다. 큰 볼에 봄동과 대파를 넣은 후 양념을 넣고 골고루 잘 버무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조금 넣고 깨를 듬뿍 뿌렸다. 봄동 겉절이를 만드는 데 15분도 안 걸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에 봄동 겉절이를 얹어 먹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봄동 겉절이 하나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접시에 봄동 겉절이를 크게 한 움큼 집어 담았다. 달걀 프라이도 했다. 냉장고에 있던 김치류 몇 가지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모두 종가집이나 비비고에서 만든 파김치, 열무김치, 무말랭이였다. 싱가포르에서도 이런 김치류를 사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압력솥에서 밥이 다 되었다는 알람 소리가 울렸다. 밥 한 공기를 떠서 얼른 식탁으로 가져갔다. 봄동을 버무릴 때 대충 맛을 봤지만 밥과 함께 먹으니 더 맛있었다. 아삭한 식감에 고소하면서도 단맛이 나서 식욕이 돋았다. 잎이 두꺼워 보였지만 씹으니 연하고 부드러웠다. 상큼한 맛이 정말 좋았다. 접시에 봄동 겉절이를 꽤 많이 담았는데도 금세 다 먹어버렸다. 밥이 꿀떡꿀떡 절로 넘어갔다.
봄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봄동을 맛보니 마치 싱가포르에도 봄이 온 것만 같았다. 봄동은 겨울 바람을 이기기 위해 잎이 땅에 붙어 자란다고 한다.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노지에서 자란 봄동을 먹어서 그런지 더 건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봄동의 효능을 찾아보니 면역력 강화, 혈액 건강, 눈 건강, 노화 방지 및 항암 효과가 있다고 나와 있었다. 몸에 좋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싱가포르에서도 신선한 봄동을 먹을 수 있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남아 있는 봄동 겉절이는 내일 비빔밥으로 만들어 먹을 생각이다. 봄동 비빔밥은 어떤 맛일지 벌써부터 설렌다. 여름 나라에서 맛본 봄동 겉절이의 맛은 단연코 최고 중에 최고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