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차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머물던 호텔에서 석회가 섞인 희뿌연 수돗물을 유리잔에 받아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들뿐 아니라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식당에서도 특정 브랜드를 말하지 않고 그냥 물을 달라고 요청하면 웨이터는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수도꼭지로 가서 손님 잔에 물을 받아다가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처음 이들을 본 내 반응은 단순했다.
"어떻게 저런 물을 마실 수가 있지? 저 석회질이 몸에 쌓이면 나중엔 아플 텐데…."
하지만 나의 이런 단순한 생각을 깨우쳐 준 한 장면을 눈 앞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해 질 녘 불그레한 노을빛이 아름답게 물드는 로마의 어느 광장이었다. 관광객들이 잔뜩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찍고 싶은 게 눈에 띄지 않아 분수대 계단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광장 모퉁이에 있던 금 세공품 가게에서 한 할아버지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가게 문을 열쇠로 잠그고 골목에 세워둔 자전거를 끌고 나와 올라탔다. 퇴근을 하시려나 보다고 생각하며 할아버지가 탄 자전거를 눈으로 좇았다. 그런데 자전거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바로 내 앞 계단에서 멈추는 게 아닌가.
머리가 새하얗고 왜소한 할아버지는 자전거에서 내리시더니 주름진 손을 체크무늬 양복 안주머니로 넣었다. 거기서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산악용 머그컵을 꺼내어서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끝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팔을 쭉 뻗어 분수대 동상이 뿜어내는 물줄기를 컵에 가득 받았다. 그리고 그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물을 마시며 하늘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에선 환한 빛이 나는 듯이 보였다. 생명수를 준 신에 대한 감사가 느껴졌다.
세상엔 나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장면을 본 순간,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깨끗함'이라는 가치도 결국 '상대적'이라는 깨달음을.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도 석회가 섞인 희뿌연 수돗물에 불만인 사람이 물론 있을 것이다.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시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정수된 물을 일부러 사 마시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이 할아버지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분수대의 물 정도면 깨끗한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석회가 섞인 물을 마시다가 생기는 담석은 살면서 생기는 잔주름처럼 불가피한 것이라고 여기는 걸까. 요즘 한국에서는 일반 가정에서도 정수기 사용이 일반화 되고 생수를 사 마시는 일이 상식이 된 지 오래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그곳에서 일종의 문화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한국인 유학생이 자신의 외국인 룸메이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룸메이트인 '그녀'가 너무 안 씻는다는 것이었다. 그녀와 국적이 같은 다른 학생들도 불결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도 덧붙였다. 고로 그 나라 사람들은 지저분한 민족성을 가졌다고 결론처럼 말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녀'는 깨끗함에 대한 조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사는 것일 수 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더러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씻은 지 사나흘쯤 지난 몸은 '그녀'의 기준에서 깨끗한 몸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을 여행하다가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가 식당 테이블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오 마이 갓'을 외치는 서양인도 있잖은가. 하지만 우리는, 비록 화장실에서 뒤를 닦는 용도로 디자인 된 것이지만 그게 뭐 대수냐고, 사용한 적 없어 '깨끗' 하기만 하다면 두루마리 휴지를 식탁에서 냅킨으로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 고추장이 묻은 입술을 닦지 않는가. '깨끗하게'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생명과 위생에 직결되는 기본 상식 중의 상식일 것 같은 '깨끗함'의 기준도 이렇듯 차이가 큰데 다른 기준은 오죽하겠는가.
무엇이 옳다거나 옳지 않은지 여부도 그렇다. 어느 정도가 상식선인지 아니면 상식 밖인지 여부를 따져보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선 차이, 혹은 입장 차이로 개인마다 상대적으로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나아가 각 사회마다 처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실적 상황이 모두 다르기에 사회마다 용인하는 상식의 기준도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이해와 포용의 자세야말로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중요한 마중물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