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
한국기독교(개신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독립운동ㆍ교육ㆍ의료분야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 말기 총독부의 야수적인 탄압으로 신사참배 등 굴종의 아픔도 겪어야 했다.
일제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병탄 이후 조선에 신사와 신궁을 짓고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강요했다. 1936년에는 각급 학교에, 이듬해에는 기독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기독교인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우상숭배를 금기시하는 기독교에서는 신사참배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강제 폐쇄된 교회가 200여 개, 투옥된 기독교인이 2천여 명, 그 중에 옥사한 사람이 5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1939년 종교단체법을 공표하면서 종교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각 시ㆍ도에 교회 하나씩만 허가하고 모두 폐쇄시켰다. 그리고 신사참배와 국방헌금ㆍ애국헌금ㆍ항공기헌납ㆍ교회종이나 철제문짝 공출ㆍ위문대 강요ㆍ근로봉사 등 온갖 방법으로 착취와 수탈을 감행하였고, 이런 일에 '성과'가 좋은 교회는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폐쇄시켰다.
일제는 이른바 '종교보국'을 강요하면서 자기네 '국체'에 어긋난 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성결교회ㆍ침례교회ㆍ제7일 안식교회 등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리고 감리교를 일본 메소 디시트교회와 합병시킨 데 이어 일본기독교단에 조선기독교단을 합병하여 이를 어용화ㆍ관제화시켜 통제하였다.
주기철(朱基徹, 1897~1944)은 경남 창원에서 아전출신인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성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중농 정도의 집안이었다. 원래 이름은 주기복(朱基福)이었으나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주기철로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다가 평북 정주군 오산학교로 유학하고, 졸업 후 헐벗고 가난한 동포들을 위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조선기독대학 상과에 입학했다. 얼마 후 안질이 심해져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 야간학교에서 일하다 안갑수와 결혼하였다.
기미년 3.1혁명 때 시위에 앞장섰다가 헌병대에 연행되고 이듬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신심을 더욱 키우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에 다니면서 양산읍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터를 옮겨 부산 초량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이후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담임하며 아내 안갑수와 의신학교에서 일하였다. 1933년, 아내와 사별했고, 과로와 허약에 시달렸다. 제직들의 권유로 오정모와 재혼하고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다. 초량교회 시절 그는 말씀에 입각해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정비하여 당회와 제직회를 확장했으며,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일제의 태평양전쟁 도발과 함께 기독교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대한 저항도 거세졌다. 대표적인 사람이 주기철이다. 그는 시종일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38년 2월에 투옥되었고 그해 가을에 2차, 1939년 8월에 3차, 1940년 5월에 4차로 투옥되어 전후 7년간에 걸친 옥고를 치렀다. 주목사가 봉직하던 산정현교회는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끝내 폐쇄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주기철은 마지막 투옥을 앞두고 유명한 <유언설교>를 남겼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버리지 마세요.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기철이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단코 하나님 외에 무릎꿇고 절할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 주님 향한 정절을 깨끗이 지키려 합니다. 주님 따르는 죽음은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주기철은 세 번째 구속되었을 때 대구형무소에서 7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그가 신사참배를 하도록 3일간 풀어 주면서 회유를 하였다. 그러나 끝내 거부하다가 재투옥되었다. 일제는 그가 일하는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해 3개월 이내에 그를 파면하면 신사참배는 강요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였다.
평양노회는 결국 주목사의 파면을 결의하게 되고, 다시 영어의 몸이 된 그는 심한 고문과 오랜 옥고로 폐와 심장이 약해져 1944년 4월 병감으로 옮겼지만 끝내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하고 말았다. 49살의 짧은 생애였다.
일제 강점기 친일배교의 목회자도 많았지만 총독부의 잔인한 고문과 옥고로 희생된 목회자와 신도들도 적지 않았다. 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봉천신학교 강사 김선두 목사도 신사참배 반대문제로 구속되었다. 1940년 7월 3일 한상동 목사도 같은 일로 경남도경찰부 유치장에 갇혔다가 해방 후에야 석방되었다. 같은 해 6월부터 왜경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3백여 명의 교역자를 검거하여 교직에서 해임시켰다.
1938년 6월 주남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인 이유로 거창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1940년 7월 같은 이유로 구금되고, 최상림ㆍ이현숙 장로, 조수옥 전도사 등도 함께 구속되었다가 해방 후에 석방되었다. 이들은 감옥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당했지만 꿋꿋하게 버텨 내었다.
철원성결교회에 시무하는 박봉진 목사는 1943년 5월 왜경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박 목사는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높으냐"는 일경의 질문에 "황도도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라고 답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일경은 예수보다 천황이 높다고 한 마디만 하면 고문 중단은 물론 석방시켜 주겠다고 회유하였지만 박목사는 끝까지 신심을 굽히지 않다가 14개월 동안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감되어 철도도립병원에서 숨지고 말았다. 이기풍 목사도 신사참배 반대로 전남 광주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