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은 인정하겠지만 과정은 과정으로서 중요하니까 그대로 따르도록!"
시인 김지하(金芝河, 1941~2022)는 석고 데생(dessin) 시간에 선생에게 지적당했다. 선생은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이었다. 서울대 미학과가 1960년 문리과대학에 편입되기 직전, 종로구 이화동 소재 미술대학에 속해 있던 시절이었다. 석고 데생을 해본 적이 없어 섬세한 면(面) 작업을 무시하고 굵은 윤곽선부터 챙겨 그리다가 혼이 난 것이다.
장욱진이 누구인가. 점 하나 선 하나에도 엄격하기로 소문난 화가다. '지속성'과 '일관성'을 주요한 특징으로 말할 정도로 평생 새와 나무, 해와 달 등 극히 제한된 소재만을 반복해 다루면서도 똑같은 그림이 단 한 점도 없다는 평을 듣는 것은 바로 그 엄격함에 기인한다. 지적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김지하는 나름대로 윤곽선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목판화가인 후배 오윤(吳潤, 1946~1986)을 그토록 많이 아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작품에 나타나는 그 고집 때문이었다. 장욱진도 고집만큼은 인정했다.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 친구인 화가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의 고집을 좋아했던 터이다.
차차 세월이 흘러가면서 김지하는 장욱진이 '과정'이라고 불렀던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마치 '첫 눈에 반해 짝사랑하듯' 데생 첫 시간에 선생에게서 중대한 가르침을 터득한 것이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일했던 장욱진은 학생들 사이에서 절대 가르치는 법이 없는 교수로 통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림을 가르치느냐. 자기 그림을 그려야지!' 간단하지만 심오한 지론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그림에 대한 고집이 대단했다. 1926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현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책에 있는 까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온통 까맣게 색칠해서 제출했다가 '병(丙)'이라는 낮은 등급의 성적을 받은 일도 있다. 그림은 그려보며 연구하는 것이지 말로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던 사람이 김지하에게 일갈(一喝)에 가까운 지적을 한 것이다. '그저 그림 그리는 죄밖에 없다'던 장욱진에게 그림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림은 붓 이전에 생각이 먼저야!' 장욱진의 역설(力說)이다. 생각이 발상으로 이어지고 그림의 됨됨이도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 대상을 결정한 다음 그것에 충실하게 화폭만 메우면 된다는 고전파 이래의 화가들과 달리 무슨 생각을 채우느냐가 늘 고민거리였다. 그는 그것을 '인상파 이후의 자아(自我)의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종종 무덤 같은 고독을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전쟁 중이던 1951년에 고향인 충남 연기에서 그린 <자화상>이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모습이라고 밝혔다.
그림, '행위'와 '표현'의 세계
그림을 '행위'[제작 과정]와 '결과'[표현]로 구분한 장욱진은 양자의 관계를 저항의 연속으로 보았다. 행위가 유쾌할 수만도 없고 설령 재밌다 해도 결과는 비참할 때가 많다고 했다. 더 나아가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저항 속에 사는 것 같고 자기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있다면 자신의 종식(終熄)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생명 있는 행위'를 통해서만 조금이나마 '뜻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생명 있는 행위란 사물을 착실히 그리고 철저하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잡념이 섞이거나 순수하지 못하면 결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붓에 욕심이 들어가면 그림은 사라지는 법이다. 화가 권옥연(權玉淵, 1923~2011)은 화가는 정신 연령이 다섯 살 넘으면 그림을 못 그린다고 말했다.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 1905~1966)과 이웃으로서 가깝게 지냈던 장욱진 역시 무언가에 물들기 이전의 어린이 같은 티 없이 맑고 단순한 마음 상태를 좋아했다.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불가에서 붓다(buddha)는 '눈뜬 이'를 의미하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m) 볼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어쩌면 장욱진이 지향했던 것은 붓다였는지도 모른다.
장욱진은 불교 명상 가운데 '마음챙김(sati)'이나 진배없는 정관자(靜觀者)의 자세를 중시했다. 아무런 방해 없이 고요와 고독 속에서 자기를 한곳에 몰아세워 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절간 같은 덕소에서 만 12년, 수안보에서 6년, 신갈에서 5년을 수행승(修行僧)처럼 지냈다. 시끄러운 잡음을 떠나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자연의 침묵'과 풍요로운 내적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말대로 우주 가운데 홀로 고립돼 영혼의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화두(話頭)처럼 먹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미륵존여래불(彌勒尊如來佛)'이란 글씨도 그가 제일 좋아했던 수안보 미륵리와 세계사(世界寺)에서 연원한다.
그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가 갈파한 '창조된 생명이 분만될 때까지 꿋꿋하게 기다리는 일만이 예술가의 삶'이란 말을 좋아했다. 꾸준히 추구하며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날마다 배우고 고통스러워하며 그러면서도 그 괴로움에 지치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 예술가의 충만한 생활이라고 했다. 마치 '술 익기를 기다리듯' 고마워하며 난산(難産)의 진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장욱진은 하루 네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작품이 안 되고 내부 갈등이 심해지면 그는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꼬박 강술을 마셨다. 부인 이순경(李舜卿, 1920~1922) 여사는 이를 두고 마치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다'고 통탄했다.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는 장욱진에게 산다는 것은 뼈를 깎는 듯한 소모였다. 그래서 그림을 위해 죽는 날까지 몸과 마음을 모두 다 써 버리겠다고 작정했다.
1970년 1월 3일 부인이 아침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화상(畵想)이 떠올랐다며 곧바로 덕소에 내려가 일주일 만에 그림 한 점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나타났다. 부인의 법명을 딴 보살상 <진진묘(眞眞妙)>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일주일간 굶다시피 하면서 작품을 끝내고 그대로 찬 온돌방에 쓰러져 자다 나온 듯한 장욱진은 병이 나 3개월을 드러누워 앓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후일 제자에게 <진진묘>는 집을 팔아서라도 되찾고 싶은 작품이라고 했단다.
한편 표현은 정신의 발현으로서 자기를 정직하게 드러내 놓는 어려운 고백이다. 단지 물감을 바른다고 표현일 수 없다고 단언했다. 가식 없는 손놀림을 통한 가장 진지한 고백, 솔직한 고백으로서의 진실이며 자신을 녹여 넣은 정확한 자기 분신이라고 했다. 심지어 아들이나 딸들은 신용하지 않아도 자신의 그림은 신용한다고까지 말했다.
분신과도 같은 자기 그림은 절대로 남에게 가르칠 수 없는 인간 내면 깊숙한 '심연(深淵)의 소나타(sonata)'다. 일찍이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는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깨달음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것이 소설 <싯다르타(Siddharta)>다. 진리는 '말로 그리고 가르침을 통하여'(in Worten und durch Lehre) 남에게 전달해줄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그림은 가르칠 수 없다는 장욱진에게 표현은 곧 자신만의 진리였다.
'선(禪)'과 '공(空)'의 세계
그 진리는 '가르침 너머의'[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세계이자 판화 밑그림에 자신이 직접 썼던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는'[직지인심(直指人心)] 세계였다. 그는 또 "화가에게는 문장이 있을 수 없다"며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불립문자(不立文字)] 세계도 강조했다. 표현은 한마디로 선(禪)의 세계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1933년 일본인 선생과의 마찰로 다니던 고보에서 퇴학당하고 성홍열에 걸려 정양(靜養) 차 6개월 동안 엄격하기로 이름난 예산 수덕사(修德寺) 만공(滿空, 1871~1946) 대선사 밑에서 지낸 적도 있다. 그 같은 경험 때문이었을까. 그는 평소 선문답처럼 말을 잘 던졌다고 한다. 1977년 여름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을 만났을 때다. 스님이 대뜸 "뭘 하느냐"고 묻자 "난 까치를 잘 그립니다"라고 잘라 말했고 스님은 "쾌하다"고 받았다. "입산(入山)을 했더라면 도(道)꾼이 됐을 것인데‧‧‧" 하자 "그림 그리는 것도 같은 길입니다"라고 맞받아쳤다. 중국 선종의 공안집(公案集)에서나 볼 수 있는 본칙(本則)이 따로 없다.
스님이 그림을 보고는 무릎을 탁 치면서 여기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도 우주가 다 있다고 했단다. 이 말은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성게(法性偈) 중의 한 구절인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를 인용한 것이다. 법성게는 <화엄경(華嚴經)>의 골수(骨髓)를 7언30구로 축약한 것으로서 스님은 그림에서 '화엄'의 경지를 꿰뚫어 본 것이다.
그때 내려준 법명이 '비공(非空)'이고 이를 풀이한 글귀가 '무아무인관자재 비공비색견여래(無我無人觀自在 非空非色見如來)'다. 직역하면 '나도 없고 남도 없어야 관세음보살을 볼 수 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어야 여래를 볼 수 있다'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골자인 공 사상을 대구(對句)로 축약한 것이다.
장욱진은 자신에게 과분하다며 그림에서 그 길을 구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림 그리는 일을 도 닦는 일과 같다고 한 그는 언제나 비워 놓은 자기 자리를 종교적 법열(法悅)의 신필(神筆)로 채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의 세계를 추구하겠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1979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차남이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온 그림 한 장 한 장이 다 경문(經文)이고 기도라고 부인은 회고했다.
'장욱진 회고전'에 부쳐 그를 추모하며 끝으로 그의 묘비문을 옮긴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 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 대학의 양화 공부로 오히려 한국 미술에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 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십일년 사월."
[참고 문헌]
김지하 <흰 그늘의 길 1> 2003
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장욱진 그림산문집> 2017
장정순 외 엮음 <진진묘> 2019
김형국 <그 사람 장욱진> 1993
김인혜 <살롱 드 경성> 2023
헤르만 헤세‧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