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마음으로 더 부산하고, 몸으로 동당거리며 명절을 준비하고 어제 설을 쇠었다.
생활방식이야 양력으로 길들여진 지 오래이고, 새해가 시작된 지도 40여 일이 지났다. 그러나 원근에 떨어져 살던 자손이 고향으로 모여들고 일가친척이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날이 설이니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스물여덟에 결혼하여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살아온 지 47년~
작년 4월 93세로 일기를 마치신 시모님을 끝으로 양가의 부모님은 모두 떠나시고 이제 우리 부부가 마지막 주자로 서있다.
해마다 양명절과 선영봉제사에 어른들 생신 등 정신차려야 할 일들이 많았었다. 지금처럼 명절휴가가 길지 않았던 시절엔, 몸도 마음도 고달프고 꾹꾹 삼켜야할 설움도 많았었다.
하룻 밤 이틀 낮 바쁘게 명절 쇠고, 명절 당일에는 먼곳에서 오는 시누이식구들 한밤중까지 뒤치다꺼리하고 나면, 친정은 시간에 쫓겨서 편하게 앉아 밥 한끼 먹기도 힘들었다. (손아래 동서들은 차례상 물리고 설거지 끝나면 친정으로 보내고, 맏이인 나는 밤중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것이 맏며느리의 도리라고 믿었다.)
작년 어머님 장례를 모시면서 남편이 동생들에게 중대발표를 했다. 금년 어머니 일주기 제사까지만 집에서 지내고 내년부터는 호국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각자 며느리 사위 손주들 직계가족이 많아지니 명절도 각기 자기집에서 지내면 좋겠다고 했다. 칠 십 중반을 넘어가는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시원섭섭하고 한편으로는 죄를 짓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올 설명절부터는 각자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나는 명절 차례상이야 누가 오든 안 오든 하던대로 정성껏 차렸다. 직계가족만 단출하게 차례를 지내며 가벼워진만큼 허전하고 미안한 마음이 자리를 차지한다.
물려받을 어느 며느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끊어야지! 마음을 굳게 다져먹고 내가 할 수 있는 날까지는 정성껏 지내리라 다짐했다. 가까이 사는 막내 시동생네집에 보낼 음식을 넉넉하게 싸서 아들 편에 보냈다.
오후에는 은적사에 모신 친정부모님을 찾아뵙고 왔다. 붐비지 않는 고찰의 고즈넉함이 심신을 편안케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엔 막내시동생이 아들 며느리들과 손녀를 데리고 세배를 온다고 한다.
세대의 바뀜과 흐름~ 편안하고 기쁘게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