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독송사(讀宋史)>(송사의 독후감)는 그동안 이순신이 중국의 사서인 <송사(宋史)>를 읽고서 쓴 독후감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 글은 초고본 <난중일기>에 정유년 10월 8일자 일기 뒤에 적혀 있고, <이충무공전서>에는 <잡저>에 수록되어 있었으며, 홍기문과 이은상이 별도의 설명 없이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에 이순신의 저작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년 전 중국의 고전적자료를 추적하다가 <독송사>의 원문이 수록된 책자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명(明)나라 때 학자인 경산(瓊山) 구준(丘濬 1420∼1495)이 지은 역사서 <세사정강(世史正綱)>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송세사(宋世史)〉25권 '송제환(宋帝桓) 강정원년(靖康元年, 1126)'조에 보면, <독송사>가 <난중일기>에 적힌 내용과 동일한 형태로 실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결국 <독송사>는 구준이 지은 것이고, 이순신은 이를 인용하여 옮겨 적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 슬프도다. 그 때가 어느 때인데, 강(綱)은 떠나고자 했던가. 떠난다면 또 어디로 가려했던가. 사람의 신하 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고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묘 사직(나라)의 위태함은 겨우 머리털 하나로 천균(千鈞, 3만근)을 당기는 것과 같아서, 바로 사람의 신하된 자가 몸을 던져 나라에 보답할 때이니, 떠나간다는 말은 정말 마음속에서 싹트게 해서는 안 될 것이로다. 하물며 이를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중략>
우선 그들의 계책을 따르되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마음을 다해 사태를 수습하고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혹 구제할 수 있는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綱)은 계책을 여기에서 내지 않고 떠나기를 구하고자 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신하된 자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겠는가.
嗚呼! 玆何等時, 而綱欲去耶. 去又何之耶. 夫人臣事君, 有死無貳. 當是時也, 宗社之危, 僅如一髮之引千鈞, 玆正人臣捐軀報國之秋, 去之之言, 固不可萠諸心, 況敢出諸口耶. 然則爲綱計, 柰何. 毁形泣血, 披肝瀝膽, 明言事勢至此, 無可和之理, 言旣不從, 繼之以死. 又不然, 姑從其計, 身豫其間, 爲之委曲彌縫, 死中求生, 萬一或有可濟之理. 綱計不出此, 而欲求去, 玆豈人臣委身事君之義哉!)"(정유년Ⅰ 10월 8일 이후 기록)
-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노승석 역주)
<세사정강>은 성화(成化) 17년(1481) 예부시랑(禮部侍郞)이었던 구준이 춘추의 필기의식과 동중서(董仲舒)의 도의정신을 계승하여 진한(秦漢)부터 원(元)까지의 주요 사건을 적은 편년체 역사서이다. 위의 내용은 남송(南宋) 때 고종(高宗) 조구(趙構)의 신하인 이강(李綱)의 거취에 대해 의견을 적은 것이다. 1126년 이강은 여진족이 누차 침략하자, 유수가 되어 여진과 싸워 큰 전공을 세웠고, 이듬해 좌상이 되어 '십의(十議)'를 건의하여 항금정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화의파의 반대로 군정에 지장을 받게 되자, 결국 나랏일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떠날 것을 청했다. 이에 파직되고 그의 항금정책도 모두 폐기되었다.(<송사> 본기23권)
구준은 <독송사>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제를 앞에 달아 서술하였다.
이강(李綱)이 군사를 독려하여 여진(女眞)을 방어하고 하관(何灌)은 힘써 싸우다 죽었다. 그런데 여진이 사신을 보내어 억지로 황금과 비단을 취하고 땅을 나누어 화친하자고 하니 황제가 따랐다. 이강은 자신의 말이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사직을 청했다.
- <세사정강(世史正綱)> 25권, 〈송세사(宋世史)〉,<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조선의 학자 이구(李榘 1613∼1654)는 일찍이 〈간사잉어(看史剩語)〉〈이강이 떠나기를 구하다(李綱求去)〉라는 글을 통해서 구준과 이강이 언급한 어록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있다.
"구경산(丘瓊山)이 말하기를 '인신이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고 다른 길은 없다'. … "고 하였다.(丘瓊山謂人臣事君, 有死無貳.)
- <활재집(活齋集)>
이구도 이미 〈독송사〉가 구준의 작이라고 밝힌 것이다. 여기에 적힌 '인신사군(人臣事君), 유사무이(有死無貳)' 글은 송나라 학자 이방(李昉)의 <문원영화(文苑英華)>에 나오는데, "한결같은 마음으로 임금을 받드는 것은 신하가 바른 도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다. 사람의 신하 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고 다른 길은 없다.(人臣事君, 有死無二) 위험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신하는 변함없는 충정으로 도리를 다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독송사> 글을 정리하면, 이강이 자신의 항금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남송의 조구의 곁에서 떠나기를 청한 것에 대해 구준은 뜻이 맞지 않는다고 떠나기보다는 미봉책이라도 반대파의 의견을 따르면서 그 속에서 사태를 먼저 수습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순신도 이 내용을 공감하여 <난중일기>에 적은 것이고 이와 같은 생각으로 시기와 모함 속에서도 일편단심 구국활동을 전개해 나갔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독송사>는 친필 원본인 <난중일기> 초고본에 실려 있어 일부 번역한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역사 기록이란,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어 만고에 남는 기록유산이다. 5백여 년 전의 기록이 비록 숨겨져 있을지라도 이처럼 후대에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수년 동안 추적하여 <독송사>의 저자를 찾아내고 이순신이 인용자라는 사실을 새롭게 밝히게 되자, 놀라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회의적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제 그 당시의 사료와 새로운 문헌 고증을 통해 구준의 저술의식과 이순신의 전승의식이 극명하게 드러남에 따라 <독송사>의 의미는 항구여일한 충정을 강조한 교훈적인 글로 후대에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