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현재 남북관계는 얼음장과 같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를 두고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2023년 12월 30일)고 선언했는가 하면, 윤석열 정부는 9.19군사합의로 대표되는 과거 남북한의 합의를 무효화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은 일상을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시민들은 남북관계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상황을 암담하게 지켜봐야만 할까? 이런 흐름 속에서라도 새 봄을 기다리듯 통일을 위해 시민들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지난 1월 말 '곽노현과 함께하는 독일 정치교육문화 탐방(현지 주관: 이진 독일정치+문화연구소장)'에 참가했다. 그중 베를린 소재 사통당독재청산연방재단에 방문해 라이너 에펠만 이사장과 면담을 진행했다. 언어가 직접 통하지는 않았어도 독일 통일을 직접 경험한 노인의 눈빛과 열정적인 구술은 남북관계를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시민의 마음 속에 통일에 대한 불씨를 피어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오마이뉴스> 지면을 빌어 라이너 에펠만 이사장과의 면담 중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통일을 적극적으로 준비했던 한 인물의 생애사를 통해 통일의 방향과 내용의 지향점은 어디여야 하는지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시민을 통제한 동독 집권당... 사회를 자각하다
"저는 동독 민주화의 주역이면서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4선 국회의원입니다. 1943년생인데요. 히틀러 집권 시 폐허에서 태어났고 어려운 성장 시기를 보냈어요. 패전 후 4개 전승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베를린을 분할해 점령했습니다. 제가 자란 동베를린은 소련 점령지가 됐고, 곧 동독의 수도가 됐습니다.
동독은 스탈린의 모델을 따랐는데, 저는 성장하면서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8세 때 베를린 장벽이 설치됐고, 이때 동독이 독재국가임을 알게 됐어요.
당시 집권했던 사회주의통일당(아래 사통당, 이날 방문한 재단은 이 사통당의 독재 청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은 시민을 통제했어요. 장벽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미 인민들의 봉기가 있었고, 국민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국가의 소유물일 뿐이었어요. 동·서독이 장벽 설치 전에는 서로 교류가 원활했기에 장벽의 설치는 급작스러운 단절을 야기했고, 시민들의 삶은 균열이 시작됐습니다.
장벽 설치 전, 제가 서베를린 지역에 위치한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1976년 서독 정치교육학자들이 정립한 교육지침, 강제성 금지 - 논쟁성 유지 - 정치적 행위 강화를 주내용으로 한다 - 편집자 주) 훨씬 이전이었는데요.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세요?'라고 물으니 '조금 기다려봐. 너희들이 좀 생각이 커지면 얘기해줄게'라고 대답했어요. 선생님은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주입하지 않았어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체감케 했다고 생각합니다.
동독 학교에서는 '당의 말씀은 항상 옳아요'라는 노래를 배웠어요.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교육이었죠. 청바지도 미제국주의의 산물이라며 못 입게 하는 등 복장도 통제했습니다."
"연대는 사람들을 용기로 이끌어 움직이게 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동독을 탈출하려고 했어요. 동독인들은 라디오를 포함해 서독의 방송 80% 정도를 시청했습니다. 그러면서 '같은 민족인데 서독은 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잘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때 제가 내린 결론은 '서로 다른 체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독인들은 '우리도 서독처럼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마음을 얘기할 수는 없었죠. 불만을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동독은 결핍 사회였고 정치·군사·외교면에서 서방 세계와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주도로 맺어진 나토와 바르샤바조약 간의 경쟁은 적어도 냉전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낳긴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나토와 바르샤바조약의 중간에 위치했던 분단기 동서독은 1980년대 핵 경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서독 미디어를 보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게 된 동독인들은 동독의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이 동독이 평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0년대는 저마다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지만 표출은 못 하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핵으로 인해 더 큰 두려움에 봉착해 있었어요. 급기야 사람들이 개인적 두려움을 넘어 연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연대는 사람들을 용기로 이끌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교회 '평화 모임'에서 싹 튼 민주주의
"동독에서 모든 공식 행사는 집권당이 주관했습니다. 그렇기에 사회적 문제를 따질 공적 공간은 거의 남아 있지 못했습니다. 당내에선 불만을 말하기 힘든 분위기였고 종교기관은 상대적으로 집권당의 지배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었어요.
바로 여기에 작은 출구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토론이 가능하도록 몇몇 목사가 길을 열어줬습니다. 이곳에서 민주주의의 싹이 텄어요. 저는 그런 소수 목사 중 하나였습니다. 교회에서의 모임을 '평화 모임'이라고 불렀죠. 이 모임이 점점 확산됐고 해방구로서 역할을 하게 됐어요. 100여 명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수천 명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을 다 수용하지 못해 교회 밖에서도 모였습니다.
한편, 서독이 전략적으로 동독 정부를 헬싱키협약에 끌어들임으로써 동독인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이때 소련에서는 정치적으로 강경했던 브레즈네프가 물러난 뒤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가 등장했어요.
라이프치히의 평화혁명이 첫 기폭제가 됐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밖에 모여 있었던 2000여 명의 사람들에게도 방송으로 전달됐죠.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오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같이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라고 했고, 이는 자발적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이를 본 동독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은 경각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진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더 많은, 8만여 명이 모였습니다. 시위대는 갈수록 처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됐고, 역으로 국가가 두려움을갖게 됐습니다. 4주에 걸쳐 연대는 커졌고 동독 전역으로 시위가 확산됐어요."
한순간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
"1989년 11월 4일이 밝았습니다. 정부의 온갖 방해 공작에도 10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됐습니다. 피켓도 집에서 각자 만들어서 시위에 참여했어요. 장벽 붕괴 전에는 핵무기 반대가 이슈였는데 나중엔 동독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동독 정부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자유롭게 서독으로 가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적용되는 것이냐?'고 질문했고, 동독 당국자는 '지금부터 즉시'라고 별생각 없이 답했습니다.
이 순간을 전 국민이 방송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죠. 방송을 본 많은 사람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고 경비병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이 '문 열라. 방송 못 봤느냐'고 소리를 질렀어요. 베를린 장벽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저는 제일 먼저 열렸던 초소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바로 옆에서 생생히 지켜봤고 기적적으로 문이 평화롭게 열려서 서베를린에 갈 수 있었습니다.
탱크로 진압하려고 한 동독 정부의 계획은 명령을 거부한 동독인에 의해 무산됐습니다. 동독인의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당시 중국의 천안문 사태, 방송의 역할, 고르바초프의 등장, 폴란드의 사회개혁 등 여러 상황들이 독일 통일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1990년 4월,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가 있었고 민주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당시 저는 국방·군축부장관으로 취임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원탁에 앉아서 토론하며 나라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습니다."
'나쁜 관계가 무관계보다 낫다'는 기조
"서독의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서독이 준비가 안 됐다면 통일은 불가했을 겁니다. 법에 통일 조항이 마련돼 있었고 서독은 한 번도 통일 조항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동독이 소련의 우산 아래 있었기에 서독은 서방 국가들과 교류했습니다. 소련 영향 아래 있던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였고요. 빌리 브란트 사민당 총리가 서독에서 집권하기 전까지 20년 정도는 교류가 일부만 가능했습니다. 빌리 브란트의 신동방정책 이후 서독은 야당으로부터 큰 저항에 부딪치게 됐죠. 그러나 '나쁜 관계가 무관계보다 낫다'는 기조 아래 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1960년대 초부터 정치수용범들을 돈을 주고 동독에서 서독으로 데리고 오곤 했는데 이것을 빌리 브란트는 더욱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로 적극 추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찌 됐든 교류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일독일의 의회 구성 후 저는 국회로 들어갔고 통일독일 국회에서는 앙케트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동독 독재 체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했고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예컨대 학교에서 부른 노래를 누가 명령했는지를 밝히는 것이지요.
아직도 독일에서 소위 '이중 독재', 즉 나치즘 독재 및 동독 공산주의 독재의 청산은 진행 중입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파헤치고자 노력합니다. 이와 관련해 사통당독재청산재단이 생겼고, 현재까지 저는 이사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800만 유로의 국가 지원을 받고 있으며 해외에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민주사회로 가는 것은 하나, 민주주의 교육이 출발이자 종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93세 이상까지 꼭 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리해야 민주사회에서 산 세월이 더 긴 것이니까요."
"민주주의를 믿고 사랑하십시오"
"통일 이후 교육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구조적·내용적 양방향 접근이 모두 필요합니다. 동독에는 국가교육과정이 있었고 교사는 그저 전달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통일 후 중앙정부가 교육과정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각 주정부 그리고 각 학교로 권한을 나눴습니다.
이제는 내용적으로는 수업을 민주적으로 합니다. 민주주의가 더 힘들고 불편한 것이라는 걸 학교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이 재단에서 합니다. 그래야 극우가 득세하는 상황과 같은 도전적 상황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일선 교사가 수업 내용과 방식을 자율적으로 채워가는 데 있어 현재 이 재단의 수많은 프로그램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년 중 90%는 학교를 방문해 오늘 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합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를 연습합니다. 민주주의를 믿고 사랑하십시오. 힘들어도 바라던 결과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남북통일을 위한 제언
"남·북한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가 더 민주적인 사회가 돼야 하고, 주변 국가와 북한이 부러워하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이것이 동독이 민주화되고 통일까지 이르는 비결이었습니다.
서로 간의 대결은 어떤 해결책도 되지 않습니다. 통일에 이르는 여러 좋은 상황들이 있었지만, 서독의 우수한 민주주의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기억하라 그리고 준비하라
면담시간은 약속된 2시간을 넘어 순식간에 지나갔다. 라이너 에펠만 이사장과은 과거 통일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생생히 들려줬다. 우리는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싶은 노 신사를 뒤로 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에펠만 이사장의 메시지는 간명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다. 전 생애에 걸친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적인 실천은 독일인에게 깊은 울림으로 전해졌고, 전해지고 있는 중이다. 독일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지속적으로 들춰 내 기억하면서 행여라도 반복될 수 있는 '독재의 망령'을 끊어내고 있다.
통일 준비해야 하는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비전을 앞세워 앞으로 나가되 과거를 잊는 실수를 하지 않는 독일로부터 배워나가야 한다. 또한, 무관계보다 나쁜 관계가 더 낫다는 점을 잊지 않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춘임씨는 화성초등학교 교사이고, 노재숙씨는 경기도교육청평화교육원 교육연구사입니다.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