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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김지성의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드라마 안에서 직접 연주해야 할 장면 때문이었다. 사전에 연출부가 연주 가능 여부를 물어오진 않았으나, 현장에서 태연하게 연주하는 척 하기는 다소 민망할 듯해, 한 곡 정도 준비해 가기로 마음먹고 동네 피아노 연습실을 찾아나섰다.  

장 폴 마르티니(J. Martini)의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어릴 적 가장 좋아했고, 희미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곡이었다. 흰 건반 위에 두 손을 사뿐히 올려놓으니, 신기하게도 30년 만에 해동된 열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러나 실수없이 치게 되기까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무사히 촬영을 마친 후, 서늘하게 뇌리를 스친 생각은 '재료 다 떨어졌다...!'였다. 또다시 피아노를 연주해야 할 역할이 주어진다면 그땐 칠 수 있는 곡이 없다.  

그날로 피아노 학원을 정식 등록하고 2년 동안 일주일에 3번, 반주법 책 6권과 하농 2권, 체르니 30번, 40번을 거쳐, 결코 오를 수 없는 산 같았던 체르니 50번의 문턱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그 사이 손가락 마디가 시큰거리고, 어깨팔 근육통에 한의원 침까지 맞아가며 피아노에 매달리다 문득 드는 생각. '근데 나, 왜 이렇게 열심히 하지...?'

이유 하나, 열등감
 
 그 사이 손가락 마디가 시큰거리고, 어깨팔 근육통에 한의원 침까지 맞아가며 피아노에 매달리다 문득 드는 생각. '나 왜 이렇게 열심히 하지?'
그 사이 손가락 마디가 시큰거리고, 어깨팔 근육통에 한의원 침까지 맞아가며 피아노에 매달리다 문득 드는 생각. '나 왜 이렇게 열심히 하지?' ⓒ elements.envato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체르니 40번을 연주하던 두 살 터울의 언니는 부모님에게 하트 유발자였다. 레슨 선생님도 입시전공을 고려해 볼 만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나는 체르니 30번도 간신히 붙잡고 있을 정도로 진도가 더뎠다.

소질 없으면 일치감치 때려 치우라는 말 또한 밥먹듯이 들었다. 늘 화제의 중심에 있던 언니에게 가려져 한없이 쪼그라든 자신감은 결국 초등학교 6학년때 피아노를 손절하게 했다. 30년 만에 다시 펼친 체르니 30번을 한 달 만에 끝낸 동력에는 분명 언니를 향한 열등감이 활시위를 당겼으리라.  

언니도 오빠의 유학을 뒷바라지하는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결국 피아노가 아닌 다른 전공으로 대학을 갔다. 결혼 후 분신 같았던 피아노가 용달차에 실려나가던 날, 옹알이 하는 딸을 안고 언니는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후 실로 30년 만에 동생의 피아노 앞에 다시 앉은 언니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그녀의 등 뒤로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건반 위에서 허둥대는 즉시, 피아노 밖으로 밀쳐내고 KTX급의 빠른 곡을 쳐 보이리라! 건반 몇 개를 머쓱하게 눌러보던 언니는 기억이 잘 떠오르질 않자, 미련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딸들의 이름을 호탕하게 부르며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를 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내가 피아노를 그만둔 건 언니로 인한 열등감이 아니었다. 다장조 8음계(배꼽 도에서부터 가슴 도까지)도 간신히 닿을 정도의 조막만한 손 때문에 스스로 접은 것이었다. 오늘도 가까스로 손가락을 벌리며 고군분투하는 슬픈 고사리손 인생.    

이유 둘, 부채의식

집집마다 유행처럼 피아노를 들여놓을 때, 친구들 사이에서 기죽지 말라고 엄마는 피아노와 동네 교습소가 없어 개인레슨 선생까지 수소문해서 구해주셨다. 이 나이에 피아노를 다시 치며 사무치게 깨우친 것은, 마음 한 켠에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돈의 개념이 무지했던 어린 시절일지라도 매달 빠짐없이 레슨비를 마련해 준 부모님께 보람을 안겨드리기는커녕, 주어진 것을 당연시 여겼고 더딘 진도에 지루함을 넘어 치기어린 불만만 키워나갔다.

피아노를 치며 사려깊지 못했던 지난 날들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뒤늦게나마, 철없이 저질렀던 불효를 부랴부랴 되갚고 싶었다. 오랜 숙제 같았던 체르니 40번도 드디어 끝냈으니, 체르니 50번은 한 곡 한 곡 탐구하듯 여유롭게 들여다보려 한다.  

이유 셋, 구원 루틴

신기하게도 피아노를 치는 손가락은 건반 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왜 머리는 온갖 상념에 젖을까. 오래 전 추억, 살면서 고맙고 미안했던 인연들, 누군가에게 서운했던 마음도 피아노를 치는 동안 자연스레 휘발된다. 연주 도중에 글의 소재가 떠올라 얼른 메모를 해놓을 때도 있다.  

들뜬 마음도 가라 앉고, 혼잡했던 생각들도 어느새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제되어진다. 스트레스에 최고의 명약은 운동이듯, 출렁이는 근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피아노야말로 고마운 유산소 운동이자 삶을 구원해주는 루틴이다.  

새로운 곡을 마주할 때마다 처음엔 까마득하다가도 계속 반복 연습하다보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완곡을 치게 되는 과정이, 마치 작품 속 인물을 처음 대할 때부터 구현에 이르기까지 대본을 보고 또 보는 내 직업과도 닮아 있다. 피아노를 통해 매번 새로운 도전과 꾸준한 인내력을 배운다.  

지금 다니는 교습소에는 아홉개의 피아노 방이 있다. '반짝반짝 작은 별'을 치는 방부터, 체르니를 치는 여러 방을 지나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치는 방까지. 한 손에 피아노 책을 수줍게 쥐고 들어오는 중년의 남성부터, 당장 내일 콩쿠르를 나가도 상 하나는 거뜬히 받을 수준급 실력자인 백발의 어머님, 거동이 불편해도 휠체어를 타고 빠짐없이 출석하는 젊은 여자분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 방에 들어앉아 말없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문득 처음, 또는 다시 피아노를 마주하게 된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피아노#체르니#열등감#부채의식#구원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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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배우이며, 끄적끄적 글쓰는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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