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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 한국 제자의 이야기.[기자말]
요시이 할배와 가호(嘉穂)라는 곳에 일하러 가는 중이다. 이름이 이쁜 이 동네는 후쿠오카 현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지리상 중심이 번영의 핵심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오래 전 시정촌 통폐합 때 인근 시로 통합되어 지금은 겨우 지명만 남아있는 동네란다. 우리 동네서 거리도 멀어 편도 1시간 넘게 걸린다. 

도로변에 줄줄이 이어지던 콩밭들도 어느새 수확이 끝나 빈 들판이다. 이 지역에서는 빈 땅에 콩을 심는게 국룰일 정도로 콩밭이 많다. 일본 요리에 콩이 두루 쓰여서 일 것이다. 콩은 두부는 물론이고 낫토같은 일상 먹거리로 쓰임새가 많다.
 
 오늘 손질 예정인 정원은 보기 드물게 넓은 곳이다
오늘 손질 예정인 정원은 보기 드물게 넓은 곳이다 ⓒ 유신준
 
낫토는 생 청국장같은 일본 전통음식이다. 콩을 삶아 띄워서 만든다. 발효식품이라서 건강에 좋다는 평가에 힘입어 국민 소울푸드로 등극한 지 오래다. 마트에 가면 별도 코너가 있어서 다양한 회사의 낫토 제품들이 쌓여 있을 정도로 인기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 4팩 1세트에 백엔 내외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낫토는 작은 사각형 스티로폼 팩 안에 맛간장과 겨자가 함께 들어있다. 그걸 식성대로 넣어 젓가락으로 잘 섞어서 먹으면 된다. 건강에 이로운 데다 가성비도 좋은 음식이니 나도 자주 먹는다. 아침식사는 대부분 낫토를 곁들인다. 특유의 냄새와 끈적끈적한 생김새 때문에 젊은 세대들에게는 별 인기가 없다는 게 아쉬움이랄까.
 
 다국적 퓨전음식 낫토는 뜨거운 흰쌀밥과 잘 어울린다.
다국적 퓨전음식 낫토는 뜨거운 흰쌀밥과 잘 어울린다. ⓒ 유신준
 
나도 처음부터 잘 먹었던 건 아니다. 다양하게 응용해 먹으면서 친해졌다. 김치를 쫑쫑 썰어 넣어 섞어서 김치낫토를 만들고 고추장을 한방울 섞어 고추장 낫토를 만들어 먹었다. 다국적 퓨전음식이다. 낫토는 뜨거운 흰 쌀밥과 잘 어울린다. 거기에 미소시루(된장국)를 곁들이면 간단하면서 건강에 좋은 아침식사가 된다.  

콩 식품이 폐에 좋다는 속설때문인지 요시이 할배도 낫토 예찬론자다. 홀아비들의 간편한 먹거리라서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할배는 헤비 스모커다. 거의 하루 종일 담배를 물고 산다. 담배를 모르고 살아온 내가 가장 고역일 때가 할배 경트럭 옆자리에 탔을 때다. 물론 창문을 내리지만 그런다고 담배연기가 사라지지 않으니 민폐다. 

일본은 흡연자 천국이다. 하루미씨네 식당도 손님이 담배를 피우면 자연스럽게 재떨이를 가져다 준다. 언젠가 후쿠오카의 벨로체라는 카페 체인점에 들렀더니 같은 공간 안에 자리만 나뉘어진 흡연석이 있었다. 금연을 염두에 두고 있는 척 하지만  눈가리고 아웅이다. 자리만 나눠놓으면 담배연기가 알아서 갈라진다는 거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정원사들의 자부심

우리가 작업 현장에 도착했을 때 할배 동생이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벌써 정문 오른편의 오래묵은 호랑가시 나무를 다듬는 중이었다. 호랑가시 나무는 잎 끝에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있어 다루기 만만치 않은 나무다. 그걸 섬세한 바리캉 작업으로 가지마다 하나씩 부드러운 구름 모양들을 만들어 띄워 놓는다. 마술이 따로 없다. 
 
 정원사는 단지 밥벌이로만 생각한다면 견디기 힘든 직업이다
정원사는 단지 밥벌이로만 생각한다면 견디기 힘든 직업이다 ⓒ 유신준
 
호랑가시 나무는 이파리가 호랑이 발톱을 닮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잎은 가죽처럼 두툼한데다 가시는 단단하고 날카롭다. 생긴 모습대로 귀신을 쫒는 나무로 알려져 정원수 구색 맞추는 용도로 많이 심는다. 맹아력도 출중해 가리코미(토피어리)로 쉽게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 

가리코미는 정원수를 인공적인 모양으로 깎아 다듬는 기법이다. 말하자면 일본식 토피어리라 할까. 바닥에 크고 작은 구형을 만들거나 긴 사각 조형물을 만들어 정원을 다채롭게 꾸민다. 가지마다 밤톨을 올려 놓은 듯 깎아 다듬는 다마치라시(구슬뿌리기)는 일본정원의 대표적 가리코미 기법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가리코미는 14세기 무로마치 시대부터 시행되던 정원수 손질 방법이다. 조선 초기 사절단으로 10개월간 일본에 체류한 송희경의 노송당 일본행록에도 가리코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서방사 정원의 나무는 위쪽을 잘라 단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16세기 아즈치 모모야마시대에 전정가위가 만들어지고 17세기 에도시대에는 본격적인 가리코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요즘 정원손질도 가리코미가 주류를 이룬다. 일본 정원사(庭園史)는 가리코미 역사다.

오늘 손질 예정인 정원은 보기 드물게 넓은 곳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묵은 호랑가시 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그 뒤쪽으로 동백나무와 금목서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집 둘레에도 다양한 나무들로 구색을 갖춰 놓았다. 어느 집이든 메인 정원은 대부분 건물 앞 부분에 둔다. 거실과 시선이 연결되는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메인 정원은 한 눈에도 전통적인 일본정원 스타일이다. 맨 앞에 자연석을 빙둘러 세워서 마당과 경계를 만들었고 그 위로 듬성듬성 철쭉을 깔았다. 뒷쪽으로 약방의 감초같은 마키나무를 군데군데 심고 가리코미로 다듬어 일본정원 특유의 단정한 분위기를 냈다. 가리코미는 개개의 디자인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구성도 의식하면서 진행해야한다. 정원사들은 예술적 감각도 중요하다. 

마키나무 뒷쪽으로 담장 근처에는 가이즈카 향나무들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겨울에도 변치않는 상록수라서 이곳 사람들이 좋아한다. 향나무 사이를 먼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먼나무는 쌍간으로 키웠는데 흉고직경이 1미터도 넘어 보인다. 그동안 여러 정원들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큰 나무들은 드물었다. 
 
 마사토가 하얗게 드러나면 바닥이 깔끔하게 빛난다
마사토가 하얗게 드러나면 바닥이 깔끔하게 빛난다 ⓒ 유신준
 
나무의 크기가 정원의 역사를 말해 준다. 얼마나 오래 된 정원일까. 족히 몇 대는 내려온 듯하다. 사람은 바뀌지만 정원은 바뀌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정원 스타일 좋아하지 않는다. 정원 손질에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사시사철 변함이 없다는게 답답함으로 비치는 거다. 세대가 달라지면 정서도 달라지는 것이다. 

정원을 꾸미는 두가지 기법

옛 사람들이 상록수를 선호한 이유가 또 있다. 가림나무 구실이다. 상록수는 자연스럽게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깥 경치가 훌륭하다면 사계절 변화를 즐기는 낙엽수도 좋은 선택이 된다. 바깥경치를 끌어들이는 기법을 차경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정원 조성기법이다. 드러냄과 가림을 적절하게 구사해 한폭의 정원을 완성하는 거다. 

정원 과외선생 요시다씨가 차경을 설명할 때 교토 료안지를 예로 들었다. 가레산스이로 유명한 료안지는 담장과 울너머 풍경이 합작해서 만들어 낸 명작이라고. 내 눈에는 그저 모래위에 돌 몇개를 늘어놓은 풍경으로 만 보였는데... 보는 눈이 다르면 보이는 게 다른거다. 배경이 좋으면 대상물이 돋보이는 이치랄까. 

정원수들이 크고 수량도 많으니 오늘 하루 일거리로 짱짱하다. 세사람이 서둘러야 제 시간에 마칠 수 있을 것이다. 호흡만 잘 맞으면 일은 어렵지 않다. 말이 필요없이 이심전심으로 다음 할 일들이 척척 보이니까. 좋은 관계는 일 효율을 올려준다.

정원 작업은 조형예술이다. 정원사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꾼다는 자부심이 있다. 단지 밥벌이로만 생각한다면 견디기 힘든 직업이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는 과격한 육체노동이다. 좋아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다. 정원사들은 정원을 완성할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에 일손을 놓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모든 정원 관리는 청소로 완성된다
모든 정원 관리는 청소로 완성된다 ⓒ 유신준
 
내가 맡은 일은 오늘도 변함없이 청소다. 같은 청소를 해도 폼이 안나는 곳이 있다. 지난번 료덕사의 정원이 그랬다. 아무리 풀을 뽑고 청소를 해도 바닥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지 않으면 폼이 안난다. 이곳 정원은 바닥에 마사토가 깔려있다. 청소를 하면 마사토가 하얗게 드러나 바닥이 깔끔하게 빛난다. 일할 맛이 난다. 

청소 순서는 정해져 있다. 일단 전지 부산물들을 걷어내어 대형 사각자루에 차곡차곡 넣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가리코미가 완성된 나무들을 한번 더 깔끔하게 털어낸다. 그리고 나서 나무 아랫부분을 세심하게 살펴 가면서 바닥을 청소해 나간다. 최종적으로 무브라 부르는 블로워로 마무리 작업을 한다. 

모든 정원 관리는 청소로 완성된다. 다른 작업을 아무리 잘해놔도 청소가 서툴면 빛이 안 난다. 마무리가 좋아야 과정이 돋보이는 이치다. 청소가 단순히 전정작업의 뒤처리가 아닌 거다. 애초 정원청소의 큰 루틴 속에 전정이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원은 다시 태어난다.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른한 피로감에 눈이 저절로 감긴다. 이곳 도로는 과속 방지턱이 없어 졸기 좋다. 이곳뿐만 아니다. 이 나라는 어느 곳을 다녀봐도 방지턱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방지턱이 없어도 규정속도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단속 카메라도 보이지 않는다. 고속도로에서 조차도 보지 못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들, 규정에 엄격한 사회다. 

한참 졸다가 깨어보니 대형마트 앞이다. 무슨 일인가 할배를 바라봤다. 빙그레 웃으며 천엔짜리 한 장을 내민다. 오늘 힘들었지? 이건 보너스야. 긴긴밤 혼자 지내려면 심심하잖아. 맘에 드는 주전부리라도 몇 개 골라 봐. 

수고했다는 마음의 표시를 이렇게 하는 거다. 성질은 오지게 급한 데다 사투리까지 심한 요시이 할배지만 마음이 따뜻하다. 겉바속촉이랄까. 사람을 드러난 것만으로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 겪어가면서 천천히 드러나는 게 진면목이다.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 일본정원이야기(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


#일본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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