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19 15:19최종 업데이트 24.02.19 15:19
  • 본문듣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가족 돌봄 근로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근로자, 노동자라는 말은 마치 일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직장에서 일만 하는 사람으로 상상하기 쉽게 만든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이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많은 경우 가족 안에서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이를, 노쇠한 부모를, 아프고 다친 형제자매를,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우리는 돌본다. 매일매일.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 교수가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이름 붙인 이 돌봄의 연결망 덕분에 인간은 울고 웃고 성장하고 관계를 이어가고 다음 세대를 키워내고 사회는 지속된다.


문제는 누군가를 돌보면서 동시에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회사가 근로자는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회사는 24시간 365일 근로자가 회사를 생각하고 헌신하기를 원한다. 그런 근로자에게 핵심 업무를 맡기고 승진의 기회를 주고 더 높은 보상을 제공한다. 일만 하는 사람이 표준이 될 때 일하는 노동자가 가족과 보내는 시간, 누군가를 돌보는 시간은 희생되며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 대가는 만만치 않다. 장시간 근로, 비표준 시간대 불규칙한 근로가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가족관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높이기도 하고, 연애할 시간과 의욕을 뺏기도, 여성의 경력 단절을 낳기도 한다는 연구들이 산처럼 쌓여 가고 있다.

가족 돌봄 근로자라는 말은 근로자가 가족 돌봄의 책임도 같이 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구미 영어권 국가들에서는 보통 돌봄자(caregiver, carer)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사람이 근로자임과 동시에 돌봄자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근로자가 가족 안에서 돌봄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일할 때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도 쉽게 깨닫게 된다. 기업이 가족 돌봄의 책임을 존중하고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시민들이 일과 함께 가족과의 시간, 돌봄의 시간을 균형 있게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도 좀 더 쉽게 이해가 된다.

수습 워킹맘에게 내려진 대법원판결
 

가족돌봄 근로자는 여성만이 아니다. ⓒ 셔터스톡

   
우리에게 아직 낯선 가족 돌봄 근로자라는 말이 작년 11월 16일 대법원판결을 계기로 회자되기 시작하고 있다. 선고 이후 여러 미디어에서 다루었던 이 사건은 그 자체가 한국의 저임금 일자리 워킹맘이 겪을 수 있는 일을 다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 같다.

영화의 주인공은 고속도로 영업소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사무직으로 일하며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여성 A씨다. 언제나 그렇듯 사건의 디테일은 복잡하지만 핵심은 가족 돌봄 근로자가 수습 기간에 새벽 근무와 공휴일 근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사가 본채용을 거부한 사건이다.

이후 이 사건은 무려 6년 동안 중앙노동위원회와 행정법원, 고등법원을 거쳐 마침내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대법원은 육아를 하는 '수습 워킹맘'에게 새벽과 공휴일 근무를 강요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아 채용을 거부한 사례가 남녀고용평등법상 '고용주의 배려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다(자세한 내용은 <노동법학> 2023년 12월호 "가족돌봄 근로자에 대한 근로시간 조정 배려 의무"(구미영) 참고).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해석이 풍부해지고 판결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이후 조치들이 충분히 취해진다면 2023년 11월 16일은 한국 기업들의 일하는 문화가 변화하는 전기를 마련한 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대법원 판결을 다룬 기사들에 달린 댓글의 반응이다. 상당히 많은 댓글이 왜 고용주가 여성을 배려해야 하느냐, 이래서 비용이 많이 드는 여성을 뽑지 않는 것이고 앞으로 기업들이 여성을 더 뽑지 않을 거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왜 흥미로운가 하면 남녀고용평등법(제19조의 5)은 "사업주는 만 8세 이하 혹은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를 양육하는 근로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조치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할 뿐 어디에도 성별을 특정하거나 여성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여성을 뽑지 않겠다는 것일까? '자녀를 양육하는 근로자'라고 쓰고 '여성'이라고 읽는 것, 우리 사회가 20년째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초저출생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다.

출산 장려금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
 

밤샘근무가 덕목처럼 여겨져 왔던 우리나라에서 출산율 반등이 일어날 수 있을까? ⓒ 셔터스톡

 
아이를 낳아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되는 순간 좋은 근로자가 될 수는 없을 거라는 유·무언의 시그널을 받게 된다면 좋은 근로자로 성장하고 싶은 여성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회사가 원하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이 만들어낸 사회적 결과를 20년째 보고 있다.

오랫동안 성 역할 규범과 출산의 관계를 연구해 온 미 하버드대 메리 브린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한국은 여성이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식도 강하지만 그러면 가족생활에 문제가 생긴다는 의식도 강한 나라이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인정하지만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생각, 일-지향 보수주의(pro-work conservative)라고 이름 붙여진 이 독특한 종류의 성 역할 의식이 조사 대상국들 중 독보적으로 강한 나라였다.

브린튼 교수팀은 2016년 연구를 통해 일-지향 보수주의가 강한 나라일수록 합계출산율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홍콩대 한신원 교수는 2023년 연구를 통해 그러한 성 역할 태도가 강한 나라일수록 아이를 기쁨보다는 무거운 짐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최근 경제학에서도 사회적 규범과 출산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중 2021년 <유럽 경제학 저널>에 실린 한 연구는 한국의 센서스 자료와 가구 서베이 자료들을 이용해 불평등한 성별 돌봄 분담이라는 사회적 규범이 사라지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11.2% 증가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한국은 남성의 돌봄 노동 참여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편이다. 돌봄이 여성의 몫이라는 규범이 사라지고 남성이 돌봄 노동에 더 많이 참여하는 변화가 일어난다면 출생률의 반등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무려 11.2%나! 그러려면 남성들이 가족과 보낼 시간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OECD 최장의 노동시간을 기록했던 나라, 직장인이라면 야근과 밤샘 근무가 덕목처럼 여겨져 왔던 나라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최근 한 기업에서 인구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거금의 출산 장려금을 지급해 화제가 되고 있다. 출산 장려금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국내외 연구들이 많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기업이 자율적으로 지급하는 보너스에 대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기업들이 초저출생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지 알리는 캠페인 효과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왕에 쓰는 돈이 효과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아이가 짐이 되지 않도록 가족 돌봄 근로자에 대해 고용주가 배려 의무를 다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이가 기쁨이 되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그중 가장 필요한 것은 기업이 가족 돌봄 근로자에 대한 차별을 그만두는 것이다.
 

김영미 / 연세대 사회학과 부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김영미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영미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는 연세대 젠더연구소장, 고등교육혁신원 혁신교육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연구 분야는 노동시장과 기업조직 내 젠더 불평등, 불평등과 인구변동입니다. 그밖에 젠더 관점의 사회혁신 교육에 관심이 있으며 다양성과 포용성 전문가네트워크 구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