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순간'이 닥쳐왔습니다. 어떤 진실이냐고요. 바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전범 기업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당했던 조선인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는 문제입니다. 이른바 '제3자 변제'라는 일제 강제노동 해법의 허구성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놓고 그간 한일 정부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2018년 10월의 대법원 판결대로 일본 전범 기업이 위로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자세를 고수했습니다. 설사 외교적 해결 방안을 찾는다 하더라도 법 해석과 집행에서 한국 안의 최고 권위기관인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마지노선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대해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 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강제 동원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의 대법원판결이 한일협정이라는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니 한국 정부가 알아서 이런 위반 사항을 시정하라고 몰아쳤습니다. 압박 차원에서 반도체 원료 수출을 통제하는 경제 보복 조처를 했고, 일본 전범 기업에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하면 더욱 강력한 보복을 하겠다고 겁박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전쟁'에서 윤 정권이 항복하면서 받은 '한일 밀월'
강제노동 갈등으로 정점에 올랐던 한일 '역사 전쟁'은 윤석열 정권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습니다. 윤 정권은 전임 문재인 정권이 강제노동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면서 한일관계가 엉망이 됐다며 지난해 3월 6일 일본 정부의 입맛에 맞는 해결책을 내놨습니다.
일본 전범 기업에 위로금 지급을 명령한 대법원 판결을 깡그리 무시한 채, 정부의 영향 아래 있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심규선 전 <동아일보> 기자)을 동원해 전범 기업이 낼 돈을 대신 갚도록 했습니다. 바로 '제3자 변제' 방안입니다. 돈을 대신 갚아주면서도 앞으로 일본 기업에 돈을 물어내라는 구상권 행사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역사 전쟁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백기 투항한 것이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권은 자기 쪽 주장을 100% 수용하면서 머리를 숙인 윤 대통령을 열렬하게 환영·환대하고 나섰습니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가 지난해에만 일곱 번이나 정상회담을 하면서 역대급 밀월을 과시하고 있는 배경입니다.
그런데 최근 '윤-기시다 밀월 관계'를 파탄 낼 아주 중대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서울중앙지법이 2월 20일 전범 기업인 히타치조선이 법원에 공탁해 놓은 6000만 원을 꺼내, 지난해 12월 대법원의 강제노동 재판에서 최종 승소한 피해자에게 전달한 일입니다. 재판에 이긴 사람이 패한 쪽이 맡겨놓은 돈을 찾아가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일 역사전쟁에서는 매우 의미가 큰 중대 사건입니다. 쉽게 말해, 윤석열 정권이 강제 동원 해법으로 내놓은 '제3자 변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 노동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일본 쪽의 철벽 논리에 구멍을 낸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일본 정부가 그토록 막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일본 기업의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히타치조선의 공탁금 사건으로 다시 파탄 위기에 몰린 한일관계
일본 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벌떼처럼 나서 아우성치고 있는 것만 봐도, 일본 쪽이 이 일을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이 이 일이 터진 당일(20일) 기자회견에서 즉각 "청구권 협정에 명백히 반하는 판결에 기초해 일본 기업에 부당한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라고 포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정부가 지난해 3월 6일 내놓은 '제삼자 변제'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압박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에는 외무성 차관이 윤덕민 주일대사를 불러 항의한 데 이어, 가와카미 요코 외상이 브라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외무장관 회의에서 조태열 외교부장관과 상견례 회담을 하면서 같은 요구를 강도 높게 되풀이했습니다.
아직 기시다 총리는 나서지 않고 있지만 일본 정부 당국자들이 총출동해 파상공세를 펴고 있습니다. 윤 정권 출범 이후 가장 거친 일본의 외교 공세입니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중 가장 친일적인 윤 대통령을 배려해 기시다 총리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하지만, 일본의 분위기를 볼 때 그가 가세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마침 일본 미디어들이 히타치 사건이 벌어지기 며칠 전에, 오타니 쇼헤이가 출전하는 서울의 메이저리그 개막전(3월 20일)을 윤 대통령과 함께 보기 위해 기시다 총리가 방한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총선 지원의 의미도 있다면서요.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때일 가능성이 크겠죠. 하지만 그런 계획을 검토했다가 히타치 사건이 돌발하면서 '불만의 표시'로 없던 일로 정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분명한 것은 일본 정부가 이 문제로 매우 심각하고 예민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에 견줘 우리 정부는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뜨뜻미지근한 반응입니다. 안이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외교부 대변인은 기자들의 질문에, 21일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히타치 사건의 공탁금 출금 문제와 관련해서는 양측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논의가 이뤄졌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답변했습니다. 또 "강제징용 확정판결과 관련해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원고분들께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요구대로 히타치조선 강제노동 피해자에게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이전의 다른 피해자에게 했던 것처럼 판결금 전액을 대신 갚아준다는 말인지, 히타치조선 피해자가 받지 못한 액수만큼만 재단이 갚아준다는 것인지 모호한 설명입니다. 될 수 있으면 문제를 키우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지나가고 싶다는 자세입니다.
윤 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막을 수 없는 '둑의 구멍'
그러나 이런 애매모호한 자세로는 윤 정부가 일본의 공세를 회피하기도 문제를 잠재우기도 어렵습니다. 일본의 공세 외에도 당장 히타치조선 피해자 쪽이 히타치조선이 낸 공탁금으로 채워지지 않은 나머지 배상금을 지원재단이 제공하는 제3자 변제로 받을 용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재단은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입니까? 피해자 쪽의 요구에 응할 것입니까, 아니면 거부할 것입니까? 응한다면 일본 기업의 공탁금을 꺼내 배상하도록 한 법원 판결을 추인하는 셈이고, 응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일본의 편을 들어 법원 판결을 부인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피해자가 히타치조선에서 받은 돈을 히타치 쪽에 되돌려주는 조건으로 판결 전액을 제3자 변제로 갚아주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나,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매국 행위로 기록될 게 뻔합니다. 피해자가 각고의 재판 투쟁을 통해 얻은 역사적 성과를 우리 정부가 나서 뒤엎는 만행이 될 테니까요. 이래저래 윤 정권으로서는 이도 저도 못 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됐습니다.
이런 사태는 애초부터 해법이 될 수 없는 제3자 변제로 강제노동 문제를 풀겠다는 윤 정권의 무지와 과욕이 자초한 일입니다. 윤 정권은, 한때 윤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엉망진창 상태에 있던 한일관계를 대승적으로 풀어냈다고 의기양양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정의와 사법 정의를 무시·외면한 대일 굴종 외교는 채 1년도 되지 않아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강제노동 피해자가 최초로 일본 전범 기업의 돈으로 배상금을 받은 히타치조선 공탁금 사건은, 일본 관방장관의 말처럼 아주 특수한 사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둑은 일거에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둑에 뚫린 아주 작은 구멍이 시발점이 돼 서서히 큰 둑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번 히타치조선 공탁금 사건이 바로 그런 시발점입니다. 역사를 외면한 엉터리 해법은 작동할 수도 없고 유효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은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