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수양론자들은 출중한 능력을 지녔어도 항상 겸양의 자세로 자신을 낮추기를 강조했다. 대저 겸양이란, 예(禮)를 실천하기 위한 기본행위로서 자신의 인격을 드높이는 행위다. 동양의 최고 사상가 공자(孔子)는 "총명하고 지혜로워도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공명이 천하를 다 덮어도 겸양으로써 지켜야 한다"고 했다(<공자가어> '삼서'). 겸양은 인격수양은 물론, 처세와 인간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덕목이기에 중시된 것이다.
때문에 중국 역대의 전략가들도 군대를 경영하는 데 겸양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병법가 황석공(黃石公)은 "공손과 겸양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다"라고 하였고, 또, "예를 높이면 지혜로운 선비가 온다"고 했다(<삼략>). 바른 몸가짐으로 겸양의 예를 행하면 지략가들이 모인다는 의미다. 촉한의 정치가 제갈량(諸葛亮)은 "예의를 아는 장수는 귀하게 되도 교만하지 않고 승리해도 자만하지 않고 현명해도 굽힐 줄 안다"고 하였다(<장원(將苑)> '장재(將材)'). 명장들은 수양을 통해 항상 겸양의 미덕을 쌓았기에 군사들을 잘 지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유학(儒學)과 병법의 이론에 밝은 이순신은 어떠했을까. 그도 평소 안분지족하며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전란 중에는 항상 자신을 경계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예로, 1593년 웅포해전 이후 부하 이응개(李應漑)와 이경집(李慶集) 등이 회항하다가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때 이순신은 부하들이 누차 승리로 자만해진 탓이라고 질책하고 자신이 지휘를 잘못한 것이라며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죄를 내리기를 청하였다(장계). 장수로서 남다른 책임의식과 겸허한 자세로 군대를 지휘한 것이다.
<난중일기>의 별지에 보면, 이순신이 군신관계와 장수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할 수 있는 고전의 명구를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글귀를 적었다.
사직(社稷)의 존엄한 신령에 힘입어 겨우 작은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초월하여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지닌 몸이지만 세운 공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입으로는 교서(敎書)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계사년 9월 16일 이후 기록 -
-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이 글은 난중일기전문을 번역한 책에만 실림, 노승석 역주)
이는 이순신이 송나라 악비(岳飛)의 <악무목유문(岳武穆遺文)> '출사를 구하는 차자(乞出師劄)'와 악가(岳珂)의 <금타졸편(錦佗稡編)>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여 적은 것이다. 이 글을 보면, 자신의 직분에 대해 매우 과분하게 생각하고, 장수로서 나라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며, 임금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자신은 오직 군사들에게 부끄러움만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겸허한 생각을 대변할 수 있는 악비의 글을 통해 자신을 성찰한 것이다.
이순신은 항상 이처럼 수양하는 자세로 생활했기 때문에, 전쟁 중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을 감화시켜 작전을 원만하게 수행한 일화가 있었다. 1598년 7월 18일 절이도해전에서 녹도만호 송여종이 이순신에게 일본군의 큰 배와 머리 70급(級)을 바쳤지만, 명나라 군사는 소획이 하나도 없자 진린이 대노하여 부하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진린에게 왜군의 머리 40여 급을 보내고 그의 부장 계금(季金)에게도 5급을 보냈다.(선조실록, 1597, 8,3) 그리고 진린에게 "아군의 승첩은 명나라 장수의 승첩이니 이 큰 공을 황조(皇朝, 명나라 조정)에 고하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이충무공유사). 그러자 진린은 "이순신은 소국(小國)의 사람이 아니니 중국 조정에 들어가면 마땅히 천하의 대장이 될 것이오"라고 하고, 선조에게 글을 올려, "이통제(李統制, 이순신)는 천하를 다스릴 재주(經天緯地之才)와 세운을 만회한 공로(補天浴日之功)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충무공신도비명). 이해 8월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되어 이순신에게 도독인(都督印)이 내려지고 수군 도독(水軍都督)에 제수되었다.
이순신은 최고지휘관으로서 공자를 비롯한 역대 전략가들의 수양론과 맥락을 같이하여 양보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였다.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 작전 수행을 위해 전공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진린에게 전공을 양보하여 크게 감복시켰다.
그 결과 상호 신뢰를 쌓고 조명연합군은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을 소탕하는 데 더욱 만전을 기할 수 있었다.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공도 포기할 줄 아는 양보의 미덕이 국난극복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이순신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