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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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봉강리 민간인학살 유해 4구의 DNA 검사 과정과 결과 https://omn.kr/27h16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는 2023년 3월 22일부터 4월 9일까지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산174번지(닭족골) 진주형무소 재소자 및 보도연맹원 학살지 24지점 중 10지점 번째 발굴 사업을 시작했다. 진주지역 매장지 24지점 중 11지점이 명석면에 많이 분포돼 있다. 명석면은 옛 진주형무소에서 10~20km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학살지로 적합한 산과 골짜기가 많다.
닭족골은 2차선 도로변을 따라 10m 산쪽으로 올라가 있다. 필자는 의문이 들었다. 보통 발굴지는 도로변에서 최소 150m 이상 산속으로 들어가야 매장지가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매장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닭족골 발굴지의 사연을 찾아서
그러나 닭족골은 도로변에서 가깝고 마을에서 잘 보이는 곳이다. 석연치 않아 2023년 4월 6일 산주를 찾아갔다.
산주(강문건)는 자신의 선산으로 조상 묘지가 있지만 그 사연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친 묘지와 사촌 형님 묘지 조성할 때 유해가 많이 나왔다는 소리는 들었다"고 말했다. 학살지 사연을 잘 아시는 분이 있을지 물어보니 삭평마을 육촌 아재(김정호) 연락처를 주며 찾아가 보란다.
다음 날인 4월 7일 삭평마을회관에 가서 육촌 강정호를 만났다.
필자 : "할아버지, 닭족골 학살지 사연에 대해 아시는 대로 말씀 좀 해주세요."
강정호 : "그때 참으로 좋은 사람,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었어. 너무 비참했어. 참말로 잘못된기라!"
필자 : "할아버지, 왜 동네 마을 앞에 다 보이는 곳에서 잔혹하게 학살했을까요?"
김정호 : "그 당시는 관지리 쪽에서 재소자들 손목을 줄로 묶고 두 줄로 세워서 끌고 올라갔어. 당시는 도로가 조그만 리어카 끌고 갈 정도로 폭이 좁았어. 학살지 건너편에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어서 마을에서 학살지가 잘 안 보였어. 그런데 총소리는 크게 들렸어. 탕! 타타탕! 살벌했어."
필자 : "학살지를 밭으로 개간해서 사용한 적 있으세요?"
강정호 : "한국전쟁 전에는 학살지가 조그마한 절터였어. 그러니까 집단학살은 빨리해야겠고, 평평한 터였기에 이용하기 편했던 것 같아. 내가 밭을 조금 개간해서 사용하다가 얼마 안 하고 말았어."
인사 후 밖으로 나갔다.
명석면에서 학살당한 유족 백자야는 필자에게 "닭족골에서 시신을 찾아간 유족들이 있다"라고 한다. 진주지역 유족들의 경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아버지와 형제가 학살당했는지 거의 모른다. 그런데 닭족골은 시신을 찾았다는 유족이 있다기에 필자는 백자야 유족과 함께 찾아가 보기로 한다.
필자는 먼저 명석면사(鳴石面史)를 찾아보기 위해서 명석면사무소 찾아갔다. 명석면사 한 권을 받아 1950년 한국전쟁기를 찾아보니 보도연맹원 학살 때 사망한 명석면민 명단(위 사진)이 서술돼 있다. 이것은 아주 고무적이다. 面史(면사)를 근거자료로 백씨 네 분이 진실규명을 받게 됐다.
필자는 면사에 피학살자를 기록한 것을 본 적 없다. 근현대사는 치욕과 배신, 파괴와 분노, 대립과 분열, 허위와 기만, 탄압과 모순, 외압과 고통, 투쟁과 상실, 탐욕과 갈등, 도전과 좌절, 절망과 비극 등이 점철돼 있다. 가까운 시대의 이야기는 왜곡되고 날조되기도 한 역사이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은 완벽한 은폐의 역사다. 근현대사를 담아낸 면사 편집위원장 손태기와 편찬위원회의 용기 있는 결단에 찬사를 보낸다. 위 자료는 진실규명 확정에 명백한 증거자료가 됐다.
"며칠 후 백자야 백우상 아들 집 가보실래예"
4월 15일 필자는 백우상 아들 집 명석면 계원마을 찾아갔다. 집에 들어서니 웬 남자가 있다.
"백우상 아들댁이 아닙니까?"
"맞는데요. 무슨일이요."
불편한 눈치였다. 차림새는 초라한 모습이 그의 삶을 짐작하고도 남아보인다. 당시 백우상은 아들 쌍둥이가 있었는데 바로 그 쌍둥이 중 한 명이었다. 입장이 곤란해 서 있는데 아내가 나왔다.
친절하게 반기는 아내분께 몇 가지 여쭤봤더니 백성태가 옆에서 "나는 잘 모른다. 내가 4살 때 아버지가 학살당했다. 우리 고모가 더 잘 알고 계신다"며 고모 댁 전화번호와 마을을 알려주신다.
필자는 곧바로 명석면 비실마을 고모댁으로 향했다.
백우상 여동생을 만나다
비실마을 입구에서 200m 정도 들어가니 골목 끝자락에 기와집이 한 채 보인다. "할머니" 부르니 "아이고! 어서오시오" 하며 반기신다.
필자 : "할머니, 오빠 백우상은 어떤 분이었어요?"
여동생 : "우리 큰오빠는 당시 41세 장남으로 쌍둥이 아들을 뒀어요. 온 집안을 책임지고 일을 도맡아 해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았어요. 잘 생기고 멋쟁이였으며 나는 큰오빠를 무척 좋아했어요. 동네에서 이장도 하고 공부해서 똑똑했어요. 보도연맹활동이 뭔지도 모르지만, 활동도 열심히 하고 동네에서 인정받은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필자 : "언제, 어디로 어떻게 잡혀갔어요?"
여동생 : "오빠는 한 달에 한 번씩 진주형무소에 가서 보도연맹교육을 받았어요. 그러던 6월 초 어느 날 인민군이 입성한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논 메고 들어오니, 경찰서에서 통보받고 새 신발과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서류 가방까지 챙겨서 멋있게 입고 다녀온다고 나간 후 열흘이 넘도록 연락도 없고 집에 오지 않았어요. 가족들이 가지 말라고 하니까 '금방 다녀올 것이니 걱정마세요' 하곤 집을 나갔어요."
필자 : "오빠 시신을 어떻게 찾았어요?"
여동생 : "열흘이 지난 어느 날 진주형무소에 간수(교도관)로 근무하던 백씨 집안 6촌 오빠가 전화가 와서요. 아무래도 오전에 백우상 형님이 관지리 닭족골로 버스 타고 갔으니, 오후에 찾아가 보라고 하더래요. 온 집안 친인척들 열 명 넘게 모여서 분주하게 수의 옷과 장례 준비를 하고 닭족골로 찾아갔어요. 백우상 오빠가 사살돼 시신이 흩어져 있드래요."
필자 : "시신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데요?"
여동생 : "다른 시신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데요. 큰오빠 시신을 찾아 수의복을 입혀서 공동묘지에 묻었어요. 올케언니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장지에 가서 통곡하며 구덩이 파놓은 곳으로 들어가 '왜 당신 혼자 가노! 나도 따라 죽을 거다'라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우리 큰오빠 학살되고 어머니는 울면서 세월을 보냈어요. 그 세월 우찌 말로 다 할끼고. 휴. 그리고 큰오빠의 흔적을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없애버렸어요."
할머니는 주섬주섬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서랍을 열고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옛 사진 한 장을 끄집어내 필자에게 보여줬다.
여동생 : "부모님께서 학살당한 사건이 한평생 한이 맺혀서 큰오빠의 흔적 털끝 하나 남기지 않았어요. 큰오빠가 가족사진 중 셋째 오빠랑 꼭 닮았어요. 그래서 큰오빠 보고 싶으면 셋째 오빠 보면서 생각하고 세월을 보냈어요. 우리 큰오빠 원한이 풀릴까요."
이어 사진 원본을 주시며 "우리 큰오빠 기사 쓰면 원통함을 풀게 해주세요" 하신다. 알겠다고 대답하며 사진을 챙긴 뒤 "아픈 사연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곤 할머니 댁을 나왔다.
'진실규명 신청 참고인' 백성태 육촌 할머니를 찾아서
백자야 유족과 백우상 진실규명 신청에 참고인으로 증언해주신 분을 찾아 나셨다. 할머니를 만나 필자를 소개한 뒤 사연을 듣게 됐다.
필자 : "할머니, 진화위 조사관 대담 어떻게 하셨어요?"
할머니 : "내가 13살 때라 기억이 생생해. 온 집안이 난리가 아니었어! 간수 오빠 연락받고 온 집안 친척들이 모여서 닭족골에서 시신 찾기 위해 우리 집 마당 밖에 친척들이 열댓 명 꽉 차 의논하느라 난리가 아니었어. 다 기억 나. 웅성웅성 비상사태였어. 이런 사실을 진화위 조사관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대담했지."
2023년 9월 진실규명 확정자 7명 집단배상금 승소
2023년 상반기 진주지역에서 학살된 7명의 진실규명이 확정됐다. 그중 백O흠, 백우상, 강이조, 강기태 4명이 포함됐다. 백성태는 포기하고 있었지만 집단 소송에서 승소해 2023년 9월 배상금이 지급됐다. 백성태는 지금도 술과 담배로 찌들어서 살고 있고 가세도 어려웠는데 배상금을 받아서 숨통이 트인다는 소문을 들었다. 참고인 증언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 소식에 필자도 안도가 된다.
관지리 닭족골의 발굴지는 유일하게 시신을 찾아간 곳
백우상 친척 교도소 간수 덕분에 닭족골 매장지는 마을마다 시신을 찾아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백우상 시신을 찾았으니 다른 유족들도 하나둘씩 몰래 매장지를 찾아가서 시신을 찾은 분이 몇십 명이 된단다. 또 두려워서 한 달 후나 몇 개월 지나 시신을 찾은 유족들도 있었고, 시신 찾아가라고 알려주셔서 고맙다고 서로 인사도 나눴다고 한다.
닭족골의 매장지는 암벽 바위가 많아서 구덩이 파기가 쉽지 않아 시신을 여기저기 던져놓고 가버린 것이다. 닭족골 매장지에선 200명이 넘게 학살당했지만, 묘지 이장과 밭 사용으로 훼손되고, 또 찾아간 시신 등으로 이번 발굴에선 29구밖에 나오지 않았다.
닭족골 발굴의 문제점
발굴 사업은 예산에 맞춰서 면적을 정한다. 그런데 발굴하다 보면 조금 더 방향이나 면적이 확장될 수도 있다. 발굴단 측에서의 융통성과 배려가 필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한번 발굴한 후 다시는 발굴할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유해들이 계시는 곳을 놓치면 그분들은 영원히 어둠 속에서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1차 발굴에서 위 사진과 같이 발굴했지만, 학살당한 자는 몇백 명이라고 했는데 유해가 적게 나와서 유족 입장에서 증언의 근거로 재요청했다. 유족은 1차 발굴지 아래 위치한 부분을 재발굴 요청해 2차 발굴에서 10여 구가 발굴됐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닭족골 발굴지 중간 보고회 날
2023년 4월 4일 닭족골 발굴장 중간 보고회 날이다. 명석면사무소에서 보고회를 마치고 발굴장으로 이동해 발굴 현장을 관람하고 있다. 갑자기 통곡하는 소리가 났다. 다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남자 유족 한 분이 널브러진 유해를 보는 순간 우리 아버지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며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유해 발굴을 한다고 해도 현장에 참석한 것 처음이라 드러난 뼛조각들을 보니 가슴이 멍해지면서 숨이 막혔다고 한다. 갑자기 발굴장의 분위기가 착잡해지면서 슬픔에 잠겼다. 며칠 후 필자는 울음을 터뜨린 유족인 강도영을 사천읍 사남면에서 만났다.
필자 : "아버지 학살당한 후 어떻게 살았어요?"
강도영 : "어떻게 내 모진 세월의 삶을 다 말할 수 있겠어요. 아버지 학살당하고 큰집에서 머슴 노릇 하면서 살다가 모진 세월 보내고 큰어머니, 큰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버지 분담금 재산 조금 챙겨서 지금은 편하게 살고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 생각에 우울증과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불안증과 답답함에 잠을 이루지 못해요. 어릴 적 트라우마가 사그라들지 않고 가슴속에 맴돌고 있어요."
필자 : "이제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사셔도 되지 않을까요?"
강도영 : "노력은 하고 있어요. 식사도 잘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어요."
닭족골 유해 29구 안치식 날
경남지역 18개 시∙군 매장지 149지점 중 진주가 24지점이다. 그중 10지점을 발굴했다. 진주시 관지리 닭족골의 발굴 사업은 2023년 3월 22일부터 4월 9일까지 발굴해 세척 과정과 감식 그리고 안치식으로 막을 내렸다. 현재 진주 컨테이너에 보관된 유해수는 총 329구다. 진성고개 발굴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 집에 111구가 보관돼 있다. 진주지역에서 발굴된 유해의 총수는 440구다. 컨테이너에 보관된 영령들은 20년이 넘어서고 있다. 유해상태는 훼손이 심해지고 있다. 하루빨리 안락한 추모시설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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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