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리 형제 해안로 해안을 지나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으로 향한다. 왼쪽 아래로 산이물, 오른쪽으로는 산이수동 마을이다. 송악산 절벽과 함께 산이물, 산이수동항 방파제의 모습이 시선을 끈다. 위력 잃은 파랑(파도)이 원담(바다에서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고기를 잡던 원형의 담)을 휘감아 돌고 있다.
송악산은 아직 지워지지 않는 아픔의 현장이다. 해안 암벽을 뚫어 조성한 인공 동굴이 15개나 된다. 소형선박을 이용, 일종의 인간어뢰에 의한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일본 해군의 특공대 시설이다. 송악산에는 크고 작은 진지 동굴이 60여 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산이물 너머로 숭숭 뚫린 동굴진지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눈에 들어온다. 일제가 제주 사람을 동원해 제주 자연을 훼손한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제주의 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산이물 뒤편에 남아있는 이러한 흔적이 지워져서는 안 될 것 같다.
해안에 있는 인공동굴과 진지동굴을 살핀다. 동굴 안에서 멀리 산방산을 바라본다. 층리 절벽이 형제섬과 조화를 이룬다. 억새가 금빛 물결을 이루며 바람에 뉘인다. 층층이 결을 내며 쌓아 올린 바윗장들이 물결을 이루듯 장관이다. 층리 절벽은 어떤 장인이 남겨놓은 작품일까.
최남단 해안로를 따라가다 1코스 계단 길인 우측의 경사길로 접어든다. 송악산 정상 탐방코스는 3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와 2코스는 탐방이 가능하고 3코스는 휴식년제 구간이다. 경사와 세찬 바람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이라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지금까지 용머리 해안에서 형제섬을 보고 걸으며 제주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다. 바람이 만들어 보여주는 풍광은 다른 어디서 볼 수 없는 시원함과 자연스러움이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나 억새조차도 제주다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송악산 트레킹의 백미는 바람에 기대어 북쪽으로 산방산, 군산오름, 멀리는 한라산까지 조망이다. 1코스 송악산 전망대에 올랐다. 모자를 부여잡고 발아래 펼쳐지는 풍광을 아들과 함께 즐기는 부자의 모습이 보인다. 온몸으로 바람에 버티더니 결국 밧줄을 잡고 내려가고 만다.
송악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산방산을 중심으로 사계해안, 용머리해안, 군산오름, 형제섬을 조망할 수 있다. 바람이 많은 송악산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굴진지로, 몇 년 전에는 외국 자본에 의한 위락단지로 전락할 뻔 하기도 했다.
탐방 2코스를 내려와 바람 부는 언덕을 지난다. 전복, 해삼, 멍게, 소라 등을 팔고 있다. 환경이 훼손되는 건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국립공원인 무등산 계곡에서 보리밥 등을 팔던 때가 생각났다. 다른 방법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송악산 둘레길 동남쪽으로 나무 계단을 내려가다가 다시 오른다. 제1 전망대에 바라보니 가파도가 발 밑에 있다. 하얗게 서 있는 풍력발전기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보이는 섬이 마라도다.
오른쪽 계곡에는 야자수 군락지가 있고, 소나무 등 숲길이 이어진다. 군데군데 네모난 나무 울타리 보호대가 설치되어 있다. 일제가 구축한 외륜 동굴 진지다. 굴과 입구 형태가 지네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확인된 입구가 20여 개에 이른다. 등록문화재 제 31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해송힐링 쉼터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물을 한 모금 들이마셨다. 점심도 거른 채 송악산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았다. 시원하고, 아름답고, 아픈 산이다. 소나무가 울창하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송악산이라고 알려져 있다. 높이 104m, 99개의 작은 봉우리가 모여 있어 99봉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