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과 단오에 선조들이 즐기던 놀이, 석전(石戰)은 우리네 민속놀이였다. 마치 눈싸움과 비슷하지만 눈뭉치 대신 상대방에게 돌을 던져, 전장에서의 피 튀기는 투석전을 민간인들이 따라서 한 것이다.
보통은 인접한 마을사람끼리 했는데, 마주보고 돌을 던지거나 지형지물을 이용해 상대편의 마을까지 밀어붙여 고지를 점령하여 승패를 갈랐다. 농경사회에서는 저수지의 물을 선점하기 위해 마을별 놀이로 전승되기도 했다.
완도에도 석전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명이 있다. 읍 소재지에서 청해포구 촬영장 가는 길에 있는 석장리는 석전의 유래와 관련이 깊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석전포였다. 임진왜란 후, 석전장으로 전해오다가 1605년 마을이 형성되면서 석장리로 바뀌었다. 망리와 합하여 망석리로 분리되면서 지금에 이른다고.
200년 전, 마을 앞 포구는 왜군과의 석전을 대비해 돌을 많이 모아 두었다. 그래서 석장포라고 했는데, 이곳에서 계미민요 때는 실제로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을 동쪽의 초계산은 망대의 역할을 해서 붙여진 지명인 듯하다. 그러니까 동망산과 남망산, 서망산, 초계봉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망대의 역할을 한 곳이다.
석전은 여러 형태로 이어졌다. 끈을 이용해 돌을 던지는 것이 물풀매질 또는 팽매질이다.
댓잎처럼 넓이가 좁고 긴 천을 반으로 접어서 그 속에 적당한 크기의 돌을 넣고 힘껏 돌리다가 한쪽 끈을 살며시 놓으면 돌멩이가 멀리 날아가는 방식. 짚으로 만든 가느다란 새끼줄이나 움푹한 망을 뜨고 두 개의 끈을 달아서 사용하기도 했다. 손에 쥐는 쪽의 끈에는 고리가 달려서 그곳에 손가락을 걸고 돌렸다.
지역에 따라 줄팽개, 헐끈팽매, 노팔매로 부르는데, 농경사회에서 주로 새를 쫒는데 사용한 연장을 전쟁에 이용한 것.
이스라엘 역사서 구약성서의 내용에는 소년 다윗이 거구인 골리앗과 싸울 때 물풀매질로 골리앗의 미간을 향해 힘껏 돌을 내리 던지자 상대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는 현장이 생생하게 기록됐다. 석전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전쟁에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매년 정초 대동강 지역에 모여 석전놀이를 하였는데, 국왕은 가마를 타고 와서 우의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고 기록했다. 놀이가 끝나고 왕은 옷을 벗어 물에 던졌다. 그러면 군중들은 좌우로 두 편을 나누어 서로 물을 뿌리고, 돌을 던져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번 되풀이한 뒤 끝냈다. 고대부터 석전놀이는 전쟁을 대비한 의식이었던 것.
그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던지 부상자가 속출하자 고려시대 공민왕은 격구와 석전놀이를 금지시키지만, 열전에 기록된 우왕은 오히려 석전놀이를 권장하고 관람을 원했다.
동국세시기에는 석전놀이에 관한 내용이 리얼하다.
"한양의 남대문, 서대문, 서소문 밖 백성과 아현동 주민이 떼로 모여 편을 가르고, 몽둥이를 들거나 돌을 던지며 고함치면서 만리동 고개 위에서 접전했다. 싸움이 무르익으면 고함소리에 땅이 흔들릴 정도며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했다.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죽거나 다쳐도 후회하지 않고 보상도 없어서 일반인은 돌이 무서워 피했다. 관청에서는 금지했지만,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다. 성안의 아이들도 종각거리, 종로의 비파정 부근과 남대문 밖에서 주로 편싸움을 하였다."
석전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안동, 김해, 평양으로 그중 안동의 석전꾼들은 맨손으로 짱돌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서 전쟁용 투석구로 돌을 날렸다. 안동 석전꾼들은 중무장하여 왜군들을 잘 때려잡았다.
삼포왜란 때 제포에서는 왜구가 가리개와 방패를 설치하고 조선 관군의 화살을 막으면서 버텼으나 안동 주민들을 데려와서 돌팔매질을 시키니 모조리 박살났다고. 또한 임진왜란 때는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긴급 소집한 안동 석전꾼들로 왜의 2군 선견대를 격퇴해 사흘 이상의 시간을 벌었고, 결국 가토 기요마사가 작전을 바꿔 1군이 통과한 조령으로 향해 낭패를 봤다.
평양의 석전꾼들은 맷집으로 유명했다. 몽둥이에 방패까지 든 평양 석전꾼이 돌에 맞으면서 밀고 들어오자 한양 석전꾼들이 밀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들은 위장 잠입하여 상대 마을로 쳐들어가 집을 부수기도 하고, 부락의 체급별로 단체전을 벌이기도 하는 등 군사작전에 버금가는 싸움을 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안동의 석전꾼들의 명성이 높았으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평양의 석전꾼들이 알려졌다. 그들은 돌을 던지면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평양의 장정들은 머리에 돌을 맞은 흉터가 없으면 치욕으로 여겼다. 싸움에 져서 도망 오면 부모가 나서서 크게 질책하여 석전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였으니 싸움의 진심이 느껴진다. 부모들은 사내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참여를 권장했다.
석전에 승리한 마을의 석전꾼들은 환영을 받으며 마을로 개선했고, 패배한 마을의 석전꾼들은 동리 밖에서 노숙해야 했다.
석전이 흥행한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워낙 뿌리가 깊어 지켜지지 않다가 일본에 의해 근절됐다. 금지한 이유는 치안안정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기차에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 독립투사의 사례가 있었기에 투석전을 가장한 독립운동을 우려한 것.
1980년대 말, 북한에서는 민속경기놀이로 널뛰기나 각종 민속놀이를 인민들에게 권장했다. 마침 석전놀이도 재현했는데,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금지시켰다. 그 대신에 군사체육종목으로 미국 놈 까부시기라며, 미군을 그려 넣은 나무판을 세우고 그곳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민속경기는 변형됐다.
1912년 3월 25일 조선총독부는 관보를 통해 석전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석전을 하다가 적발되면 구류나 벌금에 처했다. 이것은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한 것처럼 일본에게 무력으로 항쟁하는 걸 막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우리지역의 석전은 완도읍 석장포와 신지도의 석화포가 기록에 전한다. 석화포구에 널려있는 갯돌을 모아서 이순신은 해전에서 부족한 쇠구슬 탄환을 대신해 왜군을 교란시키는데 사용했다.
그 장면은 마치 폭우처럼 쏟아지는 돌비를 맞으며 혼비백산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하는, 가히 장쾌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