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
서귀포시 성산읍 한미리스쿨에서 지난달 22일 때아닌 음악회가 열렸다. 노찾사 멤버로 활약한 김창남-조경옥 부부가 한미리스쿨 심화언론인양성과정 참여로 키아오라리조트에 묵으면서 작은 음악회를 연 것이다.
언론인지망생과 시민을 위한 미디어 교육을 목표로 설립한 한미리스쿨은 교양교육에 집중한다. 미디어교육에서 교양을 소홀히 해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세계 꼴찌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미리스쿨은 콘텐츠가 있는 한국의 논객이나 교수, 언론인이나 예술인들이 원하면 무료로 키아오라리조트에 묵으면서 강연이나 공연을 하는 교양공동체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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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남-조경옥 작은 음악회 한미리스쿨에서 노찾사 출신인 김창남-조경옥 부부의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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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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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장소'와 '추억의 노래'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음악회 전 날 '나의 문화편력을 통해 본 한국대중문화사'를 강연했다. 그의 저서인 <한국대중문화사>는 진작 탐독했지만, 이 기사를 쓰기 위해 <나의 문화편력기>를 급히 주문해 29일까지 읽었다. 2시간 강연과 2시간 음악회로 밝힌 그의 대중문화 편력과 내 경험을 독자들과 좀 더 진하게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화편력은 나를 포함한 동시대인들에게 '기억의 장소'와 '추억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춘천에서 자란 그는 <나의 문화편력기>에서 등하교 길에 영화 포스터를 한참씩 들여다보며 영화 보고 싶은 욕구를 달래거나 온갖 상상을 하곤 했다고 썼다.
나는 안동중학교 시절 통학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안동의 세 극장 영화 간판을 감상하면서 안동역으로 가곤 했다. 작은 포스터와는 다른 거대한 간판이 영화의 한 장면을 공짜로 보는 듯한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만화는 감성의 교과서"
그는 또 '어머니가 만화 좋아하는 아들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고 만화를 빌려다 준 적도 있다'며 '그 시절 만화는 내게 세상을 읽어내는 창이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지를 알게 해준 감성의 교과서였다'고 회상했다.
'김종래를 읽으며 슬픔이 무엇인지, 조국애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임창의 만화를 보면서는 사랑과 우정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손의성과 이근철의 만화를 통해 정의감에 대해 배웠고, 고우영과 길창덕을 통해 유머의 코드를 알게 되었다.'
만화 가게 주인 아들이던 만화가 박재동은 책 추천의 글을 이렇게 썼다.
'와우! 이런 책이라니… 그래, 맞아. 늘 고매하고 박식하지 못해 보일까 봐, 좀 유치하고 없어 보일까 봐 불안했는데 나도 그렇게 유치한 것만은 아니었어. 아니 유치한 게 아니고 즐겁고 자랑스러운 거였어. 그게 우리의 삶이었잖아.'
자녀 교육관도 바꾼 '몰래 보던 추억'
내 고향은 안동에서도 시골이었기에 김창남이 자란 춘천시내보다 만화가 더 귀했지만 간혹 저런 만화책이 구해지면 보고 또 봐서 줄거리도 기억한다. 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가 장롱 위에 숨겨둔 음란 만화와 소설까지 탐독했다.
그런 경험은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키울 때 TV를 골방으로 보내는 대신 아파트 거실을 도서실로 만들고, 10권짜리 만화책인 이두호의 <객주>와 백성민의 <장길산> 등을 서가에 그대로 꽂아 두는 '무모함'으로 이어졌다.
음란한 장면이 곳곳에 나오지만 어차피 보게 될 '야동'으로 성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보다 상상력 넘치는 만화 그림과 원작자인 김주영·황석영의 명문장을 통해 감성을 키워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화의 지문과 대사는 명문장 모음집이나 다름없다. 만화책을 본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10권 안팎의 두 대하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하숙생'과 '사랑을 위하여'는 아이에게 어떤 의미?
소년 김창남은 집에서 술판을 벌인 아버지 친구들 앞에서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기도 했다. 국민학교 3, 4학년짜리 아이가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부른 것이다.
"어, 이 놈 봐라. 조그만 놈이 그런 노랜 언제 배웠어. 야, 하나 더 해봐라."
앙코르 곡으로 부른 게 역시 최희준의 '종점'이다.
'너무도 빨리 온 인생의 종점에서, 싸늘하게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 아아아 아아 아아아 내 청춘 꺼져가네.'
심각한 표정으로 '한 많은 내 청춘'을 부른 꼬마는 어이없어 하던 어른들한테 용돈을 두둑이 받았다는 후문이다. 그는 강연에서 "'정처없이' '속절없이' 같은 단어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쩐지 심각하게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은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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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남의 '하숙생' 한미리스쿨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에서 김창남 교수가 9살 때 부른 최희준의 ‘하숙생’과 ‘종점’을 다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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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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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부모들이 집이나 차에서 줄곧 틀어 놓는 라디오나 CD로 가요를 듣고 나름대로 가사를 해석하며 대중음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우리 막내아들은 유치원생 시절 차안에서 까불대다가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가 나오면 숨죽이며 기다리다가 한 대목에서 꼭 끼어들었다.
"내가 아플 때보다 네가 아파할 때가 내 가슴을 철들게 했고, 너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었다. 거짓의 옷을 벗어버렸다."
"아, 변태."
아이들은 유치원 친구한테 그런 말도 배워가며 크는 법이고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에서 그 말을 써먹고 싶어한다.
'메아리'와 '노찾사'로 맺어진 인연들
어른 김창남은 한미리스쿨 음악회에서도 '하숙생'과 '종점'을 앙코르 곡으로 불렀다. 그는 어린 시절 노래로 칭찬받던 경험이 피그말리온 효과로 이어진 걸까, 서울대에 입학한 뒤 노래패 '메아리'에 가입한다. 당시 미대 출신 김민기가 노래극 제작을 도와 달라고 부탁해 녹음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것이 유명한 '공장의 불빛'이다.
그 경험은 메아리 회원들에게 음악이 사회와 만나는 방식에 대한 사고의 스펙트럼을 극적으로 넓혀 주었다. 이들은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음반을 내게 되고 '노찾사'라는 약칭으로 무대 공연들을 시도했다. '노찾사'는 4집까지 음반을 내는데,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은 솔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메아리와 노찾사 활동을 통해 만나 결혼까지 한 이가 김민기의 서울대 미대 후배이기도 한 지금의 부인 조경옥씨다. 그들 부부는 한미리스쿨 음악회에서 '노찾사' 음반에 실린 '광야에서' 등 10여 곡을 열창했다.
'동요는 왜 애잔한 노래만 기억나지?'
나중에는 참석자들과 동요 메들리를 합창했다. '노래 이어 부르기'에서 참석자들이 부른 노래는 '섬집 아기' '나뭇잎배' '반달' '오빠 생각' '엄마야 누나야' 등이었다.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동요의 선율과 노랫말이 하나 같이 애잔한 곡들이어서 신기했다. 대부분 신산한 삶과 모진 세월을 견뎌온 탓인지도 모르겠다.
대중가요에 조예가 있는 언론인 김철웅은 <노래가 위로다>에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레비틴을 인용해 음악의 선호도는 십대에 결정된다고 썼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경험이 평생 간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음악회'는 사실 급조된 거였다. 부인도 노찾사 출신임을 안 내가 "강연은 안 해도 노래는 하고 가야 한다"고 강청해 벌어진 일이었다. 관객이 너무 적을까 봐 제주에 와서 사귄 이들을 초청하고 키아오라리조트에 묵기로 한 지인들도 일정을 앞당겨 오게 했다. 김 교수도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제자들에게 연락하면서 전국에서 30명 가까운 사람이 모였다. 학생들이 빔 프로젝트 스크린과 화이트보드에 '안 작은 음악회'로 표현한 이유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작금의 영화와 언론을 보라
그의 책들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그 시절과 지금 상황을 비교해보면 '역사는 진보한다'는 낙관론을 믿을 수 없게 된다. 1959년 임화수는 영화인들을 동원해 이승만을 미화하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을 제작했고, 나중에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65년이 지난 지금 이승만을 미화하는 영화 <건국전쟁>이 다시 제작돼 관객수 1백만을 넘겼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6년에 국기하강식이 시작됐고 78년부터는 국기하강식 때 거리에서 부동자세를 취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박근혜 정권 때 <연합뉴스>에서 부동자세로 국기게양식을 하던 박노황 사장은 윤석열 정권에서 TBS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은 민간기구인 위원회를 국가검열기구처럼 만들어버렸다. 박민 KBS 사장은 '땡박뉴스'와 '땡전뉴스'의 흑역사를 '땡윤뉴스'로 이어받고 있다. 이들 셋은 모두 법조언론인클럽 회장 출신이다.
문화는 억누르고 규제하면 일단 복종하는 것 같지만 용수철처럼 에너지를 비축해 콘크리트처럼 싸바른 탄압도 뚫고 치솟는다. 문화산업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게 옳다. <한국대중문화사>는 국산영화를 장려한다는 취지로 만든 '우수영화제도'가 국산영화 침체의 요인이었음을 지적한다. 정부 취향에 맞는 영화를 만든 영화사에 큰 이익이 나는 외화수입권으로 보상했으니 국산영화를 잘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피카소 크레파스'까지 금지한 반공 이념
<나의 문화편력기>는 어느 날 문방구에 가보니 인기있던 '피카소 크레파스'가 사라지고 '피닉스 크레파스'라는 유사상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경험을 소개했다. 피카소가 빨갱이라서 판매를 금지했다는 건데, 요즘 아무데나 '반공'을 앞세우는 윤 정권을 닮았다.
수구정권에 투항하는 진보쪽 부류들
과거 민주진보 진영에 섰던 사람들 중에도 수구정권에 투항한 사람이 많은 이유는 뭘까? 김창남은 <나의 문화편력기>에서 자신이 대중가요를 부르면 사회과학적 인식에 투철한 친구들 가운데는 '퇴폐적'인 분위기를 못 견뎌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회상한다.
'스스로 보다 확고한 신념과 견결한 이념을 가지지 못한 걸 부끄러워하며 자책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지금도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면, 그 시절 누구보다 강한 어조로 이념과 논리와 견결한 태도를 강조하던 친구들은 어느 결엔가 그 자리를 떠나 엉뚱한 곳에, 심지어는 그 시절 자기가 그토록 증오하며 싸웠던 반대편 자리에 떡 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보게 된다. 내가 이념과 논리에 강한 친구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이념보다는 감성, 논리보다는 연민에 충실한 친구들을 더 믿고 더 좋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