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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갈퀴로 긁어 모았지..." 이영자도 극찬한 휴게소의 숨은 이야기 https://omn.kr/27pz6
금강휴게소에서 도보로 15분 거리, 인근 마을인 우산2리에서도 휴게소의 등장은 특별했다. 평평한 토지에 주택이 반듯하게 들어선 모습이 현대식이라며 '서울 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던 우산2리는 금강 근처에 있지만, 지하수가 부족해 정작 농사는 어려워 가난했던 동네다. 하지만 금강휴게소가 지어진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특히 현재 이곳 70~80대 여성들에게는 말이다.
지난 1월, 우산2리 마을회관에 방문했을 때 만난 13명의 70~80대 여성 중 절반 이상이 한 번 이상 금강휴게소 근무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중 오랜 기간 휴게소에서 일했다는 진순자(70)·천내월(78)·박순임(81)·주유자(85)·선학례(86)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진순자씨
"청성면 고당리 높은벼루가 본래 고향이지. 시집와 마을에 와보니 벌써 고속도로가 나고 휴게소가 생겼더라고. 초반에는 콩·팥·나락·보리 등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마을에 논밭이 별로 많지 않은 편인 데다 물이 부족해서 먹고 살기가 어려웠어.
사촌 올케가 금강휴게소 일자리를 소개해준 덕분에 휴게소 기사식당에서 일을 시작해서 18년을 일했소. 정말 바쁘게 살았지. 아침 7시 40분까지 출근해서 저녁 8시 퇴근이었어. 쉬는 날이 한 달에 4번 정도뿐이고 주말 근무도 있어서 몸은 고됐지만, 때때로 야유회도 다니고 재미가 있었어.
1년에 두 번, 서울 강남에도 가보고 포항에도 갔던 기억이 나네. 체크 무늬 바지에 하얀 상의, 스카프와 명찰까지 유니폼도 있었지. 일하는 동안 돈 부족할 일은 없었어. 당시 월급이 90만 원 정도 됐고 때때로 보너스도 넉넉하게 나왔지. 덕분에 딸 셋, 아들 둘 오남매를 다 키웠어."
천내월씨
"내 고향은 청성면 합금리고 23살에 이곳으로 시집을 왔네. 와보니 마을이 화목하고 깨끗한 것이 마음에 들었어. 휴게소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집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했는데 간판은 따로 없고 과자나 술, 주전부리를 파는 식이었지. 한때 두부 장사도 했어.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다가 팔았지. 저쪽 조령리 사람들이 주된 고객이었어.
휴게소 일을 시작한 건 내 나이 43세 때야. 주변 이야기를 듣고 10년 정도 일하게 됐네. 남편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년간 일하고 오고 고생이 많았지. 그렇게 둘이 열심히 일해서 아들 둘, 딸 둘 사남매를 잘 길러냈어. 휴게소 없었더라면 애들 키우기 팍팍했겠지."
박순임씨
"영동군 매복면이 내 고향이지요. 고속도로 생기기 전에는 마을 교통이 참 열악하고 물도 부족해서 보리, 고구마만 먹으며 살았던 것 같네요. 배 타고 이원이나 옥천에 나가고 장은 주로 영동 심천에서 보곤 했는데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돌아와야 할 만큼 길이 멀었어요.
나는 휴게소에서 명예퇴직하기까지 20년간 일했는데, 고생스럽긴 했어요. 새벽 5시 30분에 나가서 저녁 8시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 집안일하고... 그래도 휴게소가 있으니 우리 또래 여성들이 그렇게 돈 받고 일할 수 있었지요.
마이산, 속리산으로 야유회 다녀왔던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네요. 명예퇴직하던 날, 사람들이 소감을 묻는데 '참 고생스러웠지만 덕분에 육남매를 다 키웠다'고 말했죠. 고마운 마음이에요."
주유자씨
돌아가신 우리 아저씨가 금강휴게소 처음 생길 적부터 거기서 팝콘 가게를 했어요. 금강휴게소 내에 자리했다지만 개인 사업소였죠. 이름이 '금강 팝콘'이었는데 지금은 팝콘 맛도 이것저것 많다지만 그때는 딱 한 가지, 한 봉지에 200원씩 해서 팔았어요. 우리 말고도 오뎅, 핫도그, 커피 파는 가게가 또 있었어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바글바글 많았나 몰라요.
우리 아저씨가 조금 일찍 하늘나라 가시는 바람에 내 나이 43세부터 한 20년간은 혼자 팝콘 장사를 했어요. 그래도 남편이 그거 먼저 해놓고 떠나서 오남매 다 대학 보내고 키울 수 있었지요. 종업원 둘씩 두고서 장사했어요. 한때는 기념품 가게까지 운영하기도 했지요.
그러다 고속도로가 여럿 생기면서부터는 손님이 점점 줄더라고요. 2000년대 초반 즈음에 정리하고 나왔네요. 금강휴게소 있으니 지금껏 살았지, 아니었음 어디서 돈 벌었을까 싶어요.
선학례씨
"본래 고향이 여기예요. 이 마을 사람들이 다 그랬듯 나도 한두 번씩 금강휴게소에서 일한 적 있지요. 정직원으로 진득하게 다닌 건 아니에요. 그래도 여기서는 돈벌이할 수 있으니까 가락국수, 해장국 집에서 몇 년간 일한 게 전부였지요. 남편도 이전에 금강호텔에서 잠시 직원으로 일했고요.
마을에서 휴게소까지 걸어서 20분 정도면 걸어갔지만, 편한 길이 생기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어요. 지금은 라바댐 아래로 오가는 도로가 있지만, 이전에는 출렁다리가 하나 있어서 그쪽으로 넘어 다녔지요. 그것도 없을 적에는 고속도로를 그냥 걸어서 다녔는데 무척 위험했어요. 경사길도 험해서 빙판길이 되면 어찌나 미끄러웠는지 두 손을 땅에 짚고 오를 정도였으니까요.
아무튼 우리 부부는 금강휴게소에서 맞벌이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어요. 저는 낮에 일하고, 남편은 밤 근무를 하게 되는 바람에 한동안 만날 일이 거의 없던 시기도 있었어요. 당시 금강휴게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 고민도 모두 집안일이었지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충실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에요. 그래서 때로는 남편과 식구들의 반대에 그만두는 이들도 많았지요.
나도 그렇게 일하다 쉬고를 반복하면서 살아왔네요. 휴게소 있어서 이렇게 사는 거죠. 쉽지는 않은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호강하며 산다고 생각해요."
새롭게 재탄생한 금강휴게소
1971년부터 30여 년간 첫 모습으로 굳건히 서서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던 금강휴게소는 2002년 시설 노후화로 한 차례 새롭게 리모델링을 거쳤다. 현대적인 디자인에 쉽게 썩지 않는 뉴질랜드 원목과 지열 난방(지하에 특수액체가 순환) 방식의 자연 친화적인 건축을 도입한 것이 특징.
초창기 개관 당시 본관에는 지하 1층에 직원식당 및 주방, 1층 한식 및 스낵 코너, 2층 전문 레스토랑 및 롯데리아, 승무원 식당, 3층 사무실, 4층 직원 기숙사가 자리하도록 했다. 리모델링을 마친 금강휴게소는 2003년 다시금 문을 열었다.
금강휴게소가 한창 공사 중이던 시기, 마을에는 큰 홍수가 있기도 했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로 수해가 발생해 휴게소 인근 마을에 특히 피해가 컸던 것. 고속도로도 물이 잠기고 일부 주택이 침수, 떠내려갈 만큼 큰 홍수였다.
"그때 유원지에 있던 흔들다리가 물에 떠내려갔지요. 휴게소가 당시 운영 중이었더라면 피해가 정말 컸을 거예요." (전영기씨)
당시 조령1리로 통하는 굴다리는 폭 2m 정도로 매우 비좁았는데, 이 때문에 집을 건축할 때 레미콘 트럭이 들어오지 못하는 등 주민들의 불편이 컸다. 금강휴게소 개축과 동시에 경부고속도로 선형개량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 입구 통로도 폭 12m 정도로 대폭 확대돼 불편을 해소할 수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숙원이 해소되고 세련된 외관으로 재탄생한 금강휴게소이지만, 이후로 휴게소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선형개량공사 이후 이곳을 지나는 차량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기 때문이다.
"2000년대 무렵부터 조금씩 손님이 줄어들었지요. 스무 곳 가까이 되던 식당들도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예전만큼 바글바글한 분위기는 아니지요." (전인경씨)
금강휴게소의 오늘
초창기만큼의 영향력은 아니라지만 금강휴게소는 여전히 오가는 이들에게 또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쉼이 되고 삶터가 되는 소중한 공간이다. 금강휴게소가 존재하는 한, 주민들은 이곳과 소통하며 살아갈 테다. 과거의 아픔도, 그리운 추억도 함께 말이다.
*현재 금강휴게소는 협력업체를 11곳 이상 두고 운영중이다. 가장 최근 입점한 협력업체는 지난 5월 문을 연 베이커리 '빛:하민'. 금강휴게소 정직원 19명, 협력업체 직원까지 합하면 70여 명이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월간옥이네 통권 80호(2024년 2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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