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해병대 채 상병 순직사건과 관련해 외압을 행사한 의혹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고발된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을 신임 호주 대사로 임명한 것과 관련해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 전 장관은 군형법상 항명 및 상관명예훼손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겨진 전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 사건의 핵심 당사자다. 이 전 장관은 2023년 7월 30일, 임성근 해병1사단장을 포함한 8명에게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경찰로 사건을 이첩하겠다는 해병대수사단의 수사결과 보고서를 직접 서명했다. 하지만 불과 하루 만에 이 전 장관은 죄명과 혐의자를 빼라는 지시를 하며 이첩보류 지시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의 사건 개입 의혹이 불거졌다. 박정훈 대령은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냐"는 윤석열 대통령의 질책을 받은 후 이 전 장관이 이첩 보류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이 전 장관은 이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고 반박했지만, 군 검찰 수사기록에는 실제 그런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전 장관은 경북경찰청으로 이첩된 해병대수사단의 채 상병 사건 조사기록 회수를 지시한 혐의(공용서류무효죄)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공수처에 고발된 상태다. 수사외압의 몸통으로 지목되고 있는 용산 대통령실과 국방부 사이의 핵심 연결고리로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 12일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야당의 탄핵대상이 된 이종섭 전 장관은 자진 사퇴했다. 그의 거취를 두고 방위산업 수요가 많은 국가에 대사나 대통령 특사로 파견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은 당시부터 나왔다. 국방부장관 직을 스스로 내려놓은 후 6개월 만에 그는 호주 대사에 임명됐다.
'국방·방산 협력'이 배경?... 적절성·임명시점 등 논란
외교부는 호주가 국방‧방산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대사 내정 배경을 설명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방부장관 출신이 재외공관장을 맡는 것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김장수 전 주중대사 이후 약 9년 만으로 아주 이례적 인사다. 지금까지 22명의 역대 주호주 대사를 통틀어도 군 출신은 제4대 이한림(예비역 육군 중장, 1977~1980) 대사와 제7대 임동원(예비역 육군 소장, 1984~1987) 대사 2명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유신정권과 5공정권에서 임명됐을 뿐, 민주화가 진행된 지난 1987년 이후 군 출신이 호주대사에 임명된 사례는 없었다.
대사 임명 시점도 논란거리다. 이 전 장관은 이미 호주 정부로부터 임명동의(아그레망)을 받고 부임 일정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져 호주 대사 임명은 이전부터 차근차근 진행돼왔던 것으로 보인다.
공수처는 지난 1월 중순 채 상병 사건 경찰 이첩을 보류하고 관련 자료 회수에 관여한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의 사무실과 자택, 박진희 전 국방부장관 군사보좌관의 사무실, 국방부 검찰단 등을 압수수색했다. 이어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정종섭 부사령관 집무실도 압수수색했다. 이들의 윗선이었던 이 전 장관도 곧 수사대상이 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이런 와중에 외압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 이 전 장관이 해외로 나가는 것이다.
문제적 공천... 신범철·임종득
이종섭 전 장관 외에도 채 상병 사건 수사외압 의혹과 관련한 인사들이 이번 총선에 공천을 받은 것도 입길에 오르고 있다.
단수공천을 받아 국민의힘 충남 천안갑 후보로 출마한 신범철 전 국방부차관은 지난해 7월 당시 이종섭 국방부장관이 외국 출장을 간 사이 장관을 대행해 사건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은 바 있다.
임종득 전 국가안보실 2차장도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인식이 강한 영주‧영양‧봉화에 단수공천을 받아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임 전 차장은 지난해 10월 24일 이종섭 전 장관, 조태용 전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1차장과 함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공수처에 고발된 상태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핵심 피의자인 이 전 장관이 따뜻하고 살기 좋은 남쪽 나라로 도피하려는 것"이라며 "이뿐 아니라, 여당은 권력의 외압 의혹 당사자들인 신범철 전 국방부차관, 임종득 전 국가안보실 2차장에게 공천까지 줬다"고 비판했다.
그는 "진실 은폐·수사 외압 사건에 대통령과 주요 권력자들, 여당까지 공범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서 "국정조사를 틀어막고 피의자를 해외로 빼돌린다고 해서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